화랑은 변신로봇인가?

2010. 2. 8. 19:01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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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은 무사집단이었을까 "
최근 신라 화랑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을 한 글이 한계레21 컬럼에 실렸다. 이 컬럼을 쓴 주인공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담당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다. 우리 무도인들이 화랑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하자는 의미에서 박교수가 주장한 화랑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사회, 정치세력에 의해 생산 유포된 화랑의 의미는 다르다


박노자 교수
그는 신라 화랑은 그동안 사회, 정치세력에 의해 그들이 필요한 화랑의 모습을 생산,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갈등의 한국사의 시대변천에 따라 화랑을 보는 시각이 계속 달라졌다는 것이다.

유교지상주의적 <삼국사기>에서 화랑에 대한 부분도 열전에 나오는 69명의 인물중 21명이 '멸사봉공'으로 이름을 날린 이미지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화랑상을 불교화해 신라가 부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불국토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도교적 취향이 강했던 이규보(1168-1241)나 이인로(1152-1220)이 사선(四仙; 네명의 국선)이라 일컫는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을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자연을 즐기고 도와 하나가 되는 옛 도사로 묘사하기도 한점 등을 고려해 같은 옛 제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어 근세에서도 화랑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게 대립적으로 해석되었다. 실학자인 이익의 경우는 화랑제도를 인재등용방법으로 이해했고, 근대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화랑을 일차적으로 '한국적 무사도'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일본 어용학자들이 무사도를 일본의 남성적 민족성과 한국인의 비겁함, 태만함, 여성스러움을 대조시킬때,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우리에게도 남성다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과제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단재 신채로는 화랑들의 무공과 무사정신을 찬양했고 화랑사상을 고대 무속신앙인 소도신앙과 관련시켜 우리 고유 사상의 진수로 해석했을뿐만 아니라, 사대주의에 맞선 우리 고유 화랑사상의 발로로 윤관의 여진정벌이나 묘청의 반란까지 해석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채호보다 더 고증정신이 강했던 인물로 민족주의 국학자 안확(안자산)을 꼽기도 했다. 안확은 "고대 조선의 무사도의 꽃, 화랑"이라고 하며 우리 고유의 무사도가 서양의 기사도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그의 저서 <조선무사영웅전>(1919)에 언급했다.

하지만 1930년대 좌파지식인들은 화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태준(1905-1949)은 "노예 반란의 진압 준비를 위하야 무장하여 군사연습을 일삼았던 노예주들의 자위단"으로 보았다. 이 사관을 시작으로 삼은 북한의 사학자들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정통으로는 보는 관점에서 세속오계를 '반동적인 도덕규범'으로 규정하고 화랑들의 전공(戰功)에 대해 '범죄적인 동족상잔에서 얻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안확류의 민족문화론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관용사학은 독재시절에 화랑에 대한 국수주의적인 찬양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시대에는 3.1운동까지 연관시키고 화랑정신을 애국, 멸공정신의 원조격으로 제기해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로 부르거나 유신초기에는 경주에 서라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유사(類似)전통양식의 화랑교육원까지 생겼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정희식 군사주의가 상대적으로 퇴조하고 성에 대한 터부가 깨진 입장에서 김별아의 <미실>이나 심윤경의 <서라벌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화랑들의 동성애와 이성애, '비보이처럼 현란한 무예훈련' 등이 강조돼 화랑은 민족 전사에서 얼짱과 몸짱, 그리고 섹시남으로 변신하고 있다는 한다.


무(武)보다는 정(精)이 본질적이었다

하지만 박교수는 그동안 우리가 접한 화랑의 이미지가 '전사로서의 화랑'에 대해 허구성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대적인 일면적인 성격으로 보았다. 화랑들이 군사교육을 받았겠지만, 과연 그것이 그들만의 특성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화랑뿐만 아니라 신라의 중급, 하급귀족들도 많은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 신라 상류사회의 인기스타로 일컫는 사다함을 들었다. 보통 15, 16세의 어린 화랑들에게 참전이 허용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다함에게는 예외로 장교가 되는 것을 허가했다는 점과 1989년 발견된 <화랑세기>에 사다함이 낭도를 거느리고 사사로이 전쟁터로 갔다는 점 등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은 화랑들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용감한 군인이라기 보다는 과민하고 다정한 젊은이에 더 가까웠다는 주장이다. 특히 남성사이의 우정을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시 신라 귀족 자제들의 보편적 분위기라는 점에서 화랑을 비롯한 당시 신라 젊은이들에게는 무(武)보다는 정(精)이 더 본질적이었다는 것이다.


용감한 무사보다는 다정한 젊은이, 무도계에서는?

역사의 실체로서 화랑의 이미지도 다양했다. 박교수는 이를 두고 김유신과 같은 잔혹한 정계거물이 7세기 초반 한명의 국선이었다면, 도둑질을 한 친구들을 고발하기 싫어 차라리 그들의 손에 죽는 길을 택한 비극의 영웅인 하급 귀족의 검군(劍君, ?-628)도 화랑조직의 낭도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조직안에서 성격이 판이한 사람들이 어울린 조직이 화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정한 국교가 없었던 신라에서 화랑조직에 속한 귀족자제들이 유교와 불교, 도교, 그리고 토착적 무속까지 동시에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독특한 혼합적 세계관과 윤리관을 만든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보았다. 이를 두고 신라의 화랑에 대해 섞임, 다의성(多義性), 다성(多聲)의 카오스로 여겼고, 이 자체가 신라인들의 삶이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 혼돈과 다양성을 '충군애국'과 같은 국방색을 덧칠하는 것은 죄악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이러한 박교수의 주장처럼 무술계에서도 이미 오래전 부터 화랑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80년대와 90년대 체육계에서는 서양의 기사도와 화랑도를 비교하거나, 일본의 무사도와 화랑도를 비교하는 움직임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논쟁들은 서양의 기사도를 중심으로 화랑도를 보았고, 일본의 무사도를 중심으로 화랑도를 본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해 최근 젊은 무도학자들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온통 무술계가 화랑정신을 앞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하고 있는건지, 정말 화랑에 대해 제대로 보고 그런 것인지. 일본에서 주장하는 동성애자에 대해 반론을 할 수 있고, 북한의 학자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박교수는 검술 연습과 함께 기도를 하고 연애 행각을 벌인 젊은이들에 대해 멸사봉공과 충군애국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가 보는 신라 화랑은 용감한 무사보다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다정한 젊은이'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무도계에서는 화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박노자 교수는 누구?
본명은 Владимир Тихонов(블라디미르 티호노프)로 2001년 귀화했으며,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 중 한명이다. 한국어로 쓴 여러 책이나 기고문 등을 통해 토종 한국 사람보다 날카롭게 한국 사회 각분야의 모순점을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한겨레 21에 컬럼을 연재하고 있다

(오슬로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담당하는 박노자 교수의 글을 허건식 소마연구소장이 알기쉽게 풀이해 놓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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