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모천회귀

2010. 1. 1. 13:01Report/Martial Arts

728x90
반응형

1971년 태권도기사를 보며

정부나 정치권이 태권도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그에게 건네진 단증이 국기원 단증이 아닌 세계태권도연맹 단증이었다니, 태권도의 상징인 국기원의 역할이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1971년동아일보, 11월18일자 기사
1971년. 동아일보 11월 18일자에는 태권도사범들의 활동을 전해주는 기사가 눈에 띤다. 기자는 ‘약소민 호국집념의 상징화'로 태권도를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고, 아시아지역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있는 사범들의 모습을 일본의 가라테 보급과 비교한 것을 발견했다.

기사에는 "우리말로 근대문명의 개척지인 유럽, 북미주의 빌딩가, 사막으로 둘러 싸인 테헤란, 국제도시 홍콩의 뒷골목에서도 태권도 한국 스포츠 코리아의 고동은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 당시 국내 경기인구는 10만, 총수련인구가 130만명으로 국내 스포츠인구의 3분의 2정도를 태권도가 차지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기자는 아시아인들이 태권도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아시아의 파란만장한 역사의식에 따른 호감으로 이야기했다.

"북방민족의 침입과 일제통치하에 놓였던 우리 민족과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한민족, 그리고 북방과 서구 제국들의 남침과 동침, 그리고 일제의 서진으로 고통을 받았던 동남아, 수십년의 전쟁속에 살아가던 당시 베트남에 태권도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 말처럼 태권도는 아시아 약소국들이 맨손무술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동질성, 아시아의 무도로 세계의 무도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권도가 아시아에 보급되던 이 당시 일본의 가라테와 유도는 일본무도정신인 엄격한 기율과 정신주입의 수단으로 문화침략자로서 보급하며 활동했다. 유도와 가라테가 일본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태권도을 비롯해 아시아 격투종목의 우위에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태권도는 아시아와 유럽, 북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은 세계인의 무도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38년전 태권도사범들은 약소국 ‘Korea'의 이름으로 낯선 땅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다.우리 현대사에서 민간외교관이었고 우리 문화를 보급하는 일등공신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하나 둘 모여 지금의 태권도세계를 만들수 있는 발판이 돼주었다.

해방이후 눈물겨운 태권도인들의 해외보급활동을 생각해 볼 때 지금 태권도계의 모습은 너무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 태권도 1세대와 2세대들의 노력은 온데간데 없고 정부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동안 국기원은 태권도인들의 비영리법인인 재단법인으로서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왔다. 그러나 국기원이 국가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 간다면 태권도인의 자율성은 그만큼 제한될 것이고 이것은 자칫 국기 태권도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모천회귀(母川回歸)라는 말이 있다.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는 이 말처럼 전세계에 보급을 위해 노력했던 모국 태권도인들의 마음이 다시 국기원이라는 모체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스포츠화된 태권도가 전세계인의 사랑받는 무도스포츠로 성장했을지는 몰라도, 모국의 태권도는 지금 딜레마(dilemma)에 빠져 있기때문이다.

정부도 태권도계가 시끄럽다고 태권도와 태권도인을 비판하기 보다는 해방이후 한국사에서 태권도가 걸어온 의미에 비중을 두고 태권도인들 스스로가 풀어가야 한다는 대원칙속에 해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무카스 Tip

딜레마(dilema)란 양도(兩刀)논법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며, 이글에서는 현재 태권도가 정부의 선택이냐 태권도인들 스스로의 해결이냐라는 두 개의 판단 사이에 끼어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