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의 영웅 '김윤후'

2012. 8. 15. 14:29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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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김윤후의 초상_우측은 드라마 무신에 나온 김윤후역을 맡은 배우 박해수

지금처럼 스타가 많지만 영웅은 그리 많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느시대에도 영웅은 존재했다. 용인을 지켜낸 영웅이라면 단연 승려 김윤후를 꼽는다. 그가 용인시민들에게 영웅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거대 몽골기마병을 물리친데 있다.

아시아의 거대 기마부대를 지녔던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비롯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까지 거침없이 침략했다. 몽골기마병에 대해서는 지금도 중앙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는 그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반도의 땅에 있던 고려에 대해서는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 중에서 지금의 용인 땅에 있는 처인성에서의 전투는 그들에게는 아픈 역사를, 우리에게는 그들을 막아낸 승리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승려 김윤후에 의해 단 한발의 화살로 적장을 죽게하고 대몽골군대를 퇴진시킨 전략은 당시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고려를 처음 침공한 몽골의 장군 살리타(撒禮塔(살례탑), Salietai, ?~1232)가 처인성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살리타가 처인성에 파견되어 있을 때 누가 쏜지 분명치 않은 유시(流矢)에 피살되었다는 학계의 논쟁은 있다). 몽골 기마병들은 귀주성, 자주성, 충주성 등에서 고려사람들이 얼마나 강했는지 실감하게 하였고, 용인 처인성에서 화살에 맞아 몽골은 결국 패전을 맛 본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몽골은 고려침공을 중단하게 하였고, 몽골은 금나라를 정벌한 이후에도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특히 처인성의 승전보는 강화도로 피난가 있던 고려의 조정도 기를 살려 몽골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처인성 전투는 몽골의 침략에서 그 맥을 끊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처인부곡은 노비들의 징집지였던 곳으로 몽골군 4만여명의 대군을 2천여명이 맞서 싸워 이긴 것이다. 무엇보다 정규군이 아닌 승려와 처인부곡(용인시 남사면)의 민중들의 힘이 거대 몽골군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전쟁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악산도 아닌 평지나 다름없던 토성에서 민(民)이 하나가 돼 몽골기마 략군의 수장을 사살해 고려와 몽골제국을 놀라게 했다는 점은 지금 용인시민들에게도 깊이 간직할만한 일이다.

김윤후의 활약은 처인성만이 아니다. 제3차 몽골이 침략한 1936년에 충주성의 전투에서 다시한번 성과를 올린다. 당시 충주는 현으로 부곡처럼 노비들의 징집지였던 곳으로 김윤후는 전투가 길어지자 "열심히 싸운 사람에게 노비문서를 태워준다"라고 하고 전투에 참여한 노비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충주성 전투의 승리를 이끈다. 김윤후는 충주성에 입보한 충주의 관민(官民)을 지휘하여 70여 일을 저항하였다가 항전이 장기화하자 성안의 식량이 부족하고 민심도 동요되자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공을 세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포상한다는 약속으로 위기를 극복하였다.

김윤후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경기도 평택지역에 있던 백현원의 승려였고 1932년 몽골이 침입하자 처인부곡의 처인성에 몸을 피하며 입보민들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몽골의 살리타가 피살되었고 이를 계기로 몽골군의 침입을 저지시키고 철군하게 만들었으며, 살리타를 사살한 김윤후에게 고려조정이 상장군을 제수하였지만 자신만의 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했다는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하지만 섭랑장(攝朗將)의 무반직을 받았고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시켰다고 전해진다.

이후 무반으로 입신하여 1253년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에 임명되어 몽고의 5차 침략군은 예쿠(也窟)의 지휘 하에 10월 충주성을 포위하였으며 치열한 전투를 했다고 한다. 또, 충주성 함락에 실패한 몽고 주력군이 포위를 풀고 고려에서 철군하였다. 이 공으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의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크게 승진하였으며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고종 말년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고, 원종조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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