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민간무술단체의 성립과 무술교육발달기(1901-1927)

2010. 1. 20. 15:55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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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무술의 근대성은 반드시 비전성에 대하여 공개성(openness)과 교육가능성(teachablity)을 전제로 한다(김용옥, 1990)

  중국에서 청나라 말기 과거제도에서 무과시험(武擧制度)의 존재 및 봉건교육의 기초가 되는 봉건적 자연경제가 완전붕괴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제도는 무너지기는 했지만, 중국내에서는무술을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은 중국내 넓은 농촌이나 도시에 존재했으며 이것은 중국의 민간무술을 전승하는 중요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교육적 내용은 거의 대부분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한 유파무술이 전수되는 양상을 띠었다.

  농촌이외의 도시지역에서는 농촌지역과 같이 일정한 범위의 전승형태를 벗어나 청소년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무술을 지도하는 특성을 지녔으며, 각 유파의 분화를 통해 사회에 전파되었다. 중국 대부분의 무술문파의 전통들도 19세기에 만들어진 의화단 사건이후다.

  1901년이후 무거제도가 폐지되고, 신식 학교가 설립되었으면서도 각 직역의 무술도장이 존재했다. 이런 무술도장은 중국내 민중들의 애국사상의 고양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원동력으로 사회발전 및 교육발전에 적응하며 도시 및 농촌의 무술교육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변화에서 특히 체육전문학교나 보통학교가 무술을 체육수업에 도입하였다. 이런 현상이 각지역별로 확대되면서 민간무술단체가 무술교육의 사회화추진에 그 역할을 담하였으며 학교체육과정에 무술수업의 설립을 추진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무술은 청나라의 봉건적 전제통치아래 있던 무술교육의 기본형태가 개혁되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무술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은 민 국의 성립시기인 청대말인 1910년에 하북성(河北省) 정해현(靜海縣)의 곽원갑(藿元甲)이 정무체조학교를 세운 것이 계기가 되어 무술교육이 시작되었다(笠尾恭, 1994). 곽원갑이 세운 학교가 발전하여 상해중앙정무체육회가 되면서다. 정무체조학교는 각지의 권법가들을 모아 중국의 전통있는 무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하자는 취지로 세워진 학교다. 과거 비전되던 여러 무술들이 공개된 것이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중국 남방 각지를 거쳐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확산되어 지부가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북파의 무술들이 각처에서 전승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천진(天津)에 ‘중화무사회(中華武士會)’가 성립되었다. 중화무사회는 청나라 말기 중국북방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단체다. 이 중화무사회는 대동단결, 중화무술의 제창, 민족정신의 발양, 일본무사도에 대한하는 것들을 제시했다. 특히 이 중화무사회는 1914년 일본 경경에 분회를 설립하기도 했다(中國武術大辭典編輯委員會, 19990)

  중국무술에 있어 1901년에서 1911년의 시간은 짧은 시간동안 중국무술의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시기다. 의화단 실패로 침체되어 있던 중국무술계가 ‘신정(新政)’이 시행되면서 군대뿐만이 아니라, 민간무술도 다시 아편전쟁이전으로 원상복귀되는 현상을 보이면서 민간단체의 무술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유파별로 스스로 터득하는 기법에서 건강문화로서 도시에 유파조직이 생겨나는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특히 학교교육에 있어서도 전통체육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은 강유위와 같은 사람들이 중국의 근대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패로 돌아가다가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이 혁명은 왕정이 아닌 근대화의 기반이 서게 되었으나 공산당과의 중국 내에서의 세력다툼과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으로 말미암아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내전에서 국민당이 지는 바람에 중국은 공산국가가 된다. 손문의 사상은 대표적으로 삼민사상은 공자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 중화민국 헌법의 형식은 물론이고, 중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유교와 어떤 관계가 있다. 서구의 압력 때문에 일본은 1868년 철저한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공화국을 세우는 대신 강력한 왕정체제를 수립하였다. 이 당시 중국의 경우는 자신의 문화에 대하여 특히 정신에 대하여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있었다(H.G. 크릴, 1994)

  1912년에서 1927년은 이런 혁명의 분위기에서 민간무술단체가 발전하게 되었고, 무술연구가 전개되었으며, 학교에서 무술교육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중화신무술이 1916년에 편집되어 1919년 출판되었고, 1917년에는 군대와 경찰에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었다(馬良, 1924). 군부대에서도 다시 무술제창이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무술을 접근전에 사용할 수 있는 전투수단으로서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병사의 몸을 단련하는 수단으로 무술을 제시했다.

  이 시기의 민간 무술단체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존 무술단체가 분회를 설립했으며, 각종 학교에 무술교육이 적용되기도 했다. 1912년에서 1927년에 설립된 각종 민간무술단체는 다음과 같다.

  상해정무회여자부(1917)  상해무술학회(1918)  상해제일공동체육장국술회(1918)

  정무체육회한구분회(1918)  중화무술회(1918) 북경무술체육회(1918) 생해서기무술전습소(1919) 정무체육회광주분회(1919) ------- (중략) --- 서민무술연구사(1924) 사천무사총회(1925) 치유권사(1925) 무당태극권사(1926) 하남성무술회(1927) 정무체육회순경분회(1927)


  각종 학교에 무술교육이 채택된 것은 1914년 상해체조학교 교장이던 서일영(徐一永)에 의해 제시된 청원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청원서를 시두로 1915년 전국교육연합회의 제1차회의에서 북경교육회는 〈중국고래의 무술을 학교의 필수과정으로의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무술을 학교교육체조과의 수업에 포함시켜 상무정신을 고취시키고, 무술을 전수받은 인재를 무술교사로 채용하여 무술교재와 무술교육의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며, 사범학교에 무술강의를 전공과정으로 개설하여 무술교사를 양성한다. 또한 체육전습소를 여러개 설치해 일반인의 체육을 증진케한다”(熊明安, 1990)라고 제시하였다. 이런 제안을 통해 학교무술과정이 설치되었고, 무술과 수업내용이 교재로 편찬되었으며, 체육계 및 체육전문학교에 무술과가 설치되었다. 그후 일반학교에도 무술과가 설치되는 등 무술교육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었다.  특히 무술교사육성에 있어서는 무술전습소 설립, 무술학교 및 체육계에서의 무술교사 육성, 그리고 민간무술단체에서 적극인 무술교사를 육성하는 등 무술교육이 학교교육에 접목되는 성과를 얻어냈다.

  한편 무술연구에 있어서는 각종 무술관련 간행물을 비롯해 교재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외국체육을 소개하는 출판사에 무술서적 출판을 촉진시켰고, 무술지도자들에게는 문화보존, 국기발양이라는 차원으로 무술의 정리 및 출판작업에 대해 자각시켰다. 뿐만아니라 무술지도방법과 관련해 연구가 진보되었다. 특히 ‘분해지도(分解指導)’를 강화하고, 무술의 단체지도방법, 전통연습방법을 근대화할 수 있는 연구 및 총괄적인 응용법 등이 제시되고 연구되었다. 또한 근대자연과학을 도입하여 무술교육에 접목하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끝으로 무술경기를 만들어 활성화시키는 방안이 제기되어 실행되었다. 이것은 아편전쟁이후 서양스포츠가 유입되었고, 유도가 경기화되면서 중국에 유입되면서 중국무술의 경기화와 규범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국적인 규모의 대회는 1923년 ‘전국무술운동대회’가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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