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무도의 핵심, 에도시대

2010. 1. 1. 12:27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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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용된 무도(武道)라는 용어는 무술보다 더 오래 되었다고 한다. 무도라는 용어는 연대기적으로는 에도시대 초기에 발견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류(流)에 있어서는 도쿠카와 시대 후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무도는 거의 절대적 인 것으로 되었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류에 무도라고 일컬어지던 봉건시대의 무술로부터 유래한 체계적인 교육방법이 있었다. 이것은 고대 무술의 유에 의해 추구되었던 것 보다 훨씬 더 목적달성을 위한 교육적인 방법이라는 의미가 강하다(최복규, 1995:4).
일본에서 전쟁이 종식된 도쿠카와시대부터 무사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불교(禪佛敎)에서 유교로 전환되었다. 이때 부터 무사들의 의식과 삶은 유교적 가치관과 철학에 의해 더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상황으로 전화된 것이다.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도쿠카와는 무사세계가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원하여 무사들이 올바른 윤리관을 갖게 하기 위하여 문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에도시대 초기 무사들의 사치스런 생활과 농민들에게 무사계급을 이용하여 착취하기 시작했고, 무예보다는 유희를 즐기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경제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계급에서 상업을 하는 층이 경제적 재력이 무사계급보다 앞서게 되자 봉건체제의 한계를 맞이하기도 하였고, 무사계급은 타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전쟁터에서의 충절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도쿠카와는 유교를 기초로 하여 문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에도시대의 초기는 도쿠카와의 말기이기 때문에 무적(武的)분위기가 문무양도(文武兩道)로 전국을 통치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가 1615년에 제정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13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범죄자 처벌, 사적인 축성, 사적인 약혼, 인재등용, 치국안민의 기강을 비롯해 문무의 장려, 예절의 엄수, 질소검략(質素儉約)을 지키는 것 등과 같이 무사가 지켜야 할 조건들이 들어 있었다.
또한 도쿠카와 막부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주자학을 당시의 공식적인 정치이데올로기로 설정하였으며(Draeger D.F., 1973:22), 무사들의 생활과 수련에는 그 이전에 유행하였던 선불교의 사상과 새로이 대두된 유교사상이 공존하게 된다. 이 당시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영향력이 강화된 유교가 막부에 의한 〈무가법도(武家法道)〉라는 규범으로 무사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당시 무사들의 의식과 윤리, 그리고 행동을 규정했던 제반규범과 가치관을 집약한 것이 무사도(武士道)이다. 이러한 무사도의 이데올로기는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氣)는 생활태도에 그러한 이(理)는 윤리적 규범을 작용시켜, 군주=천황=국가를 위하여 모든 것, 즉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것이 바로 도쿠카와 무사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도쿠카와시대의 유교는 무사들로 하여금 정신적인 교양임과 동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의식화된 예의범절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생활과 행위의 계율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유교의 영향은 무도 수련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무술의 형식화와 의식화가 그것이다.
복잡한 예의와 의식의 강화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형(型)이나 본(本)의 제정과 이러한 형과 본을 중심으로 한 수련양식의 유행으로 검술역시 다양한 유파들이 나타나고, 각 유파별로는 고유한 기술적 특징을 형으로 체계화시켰다. 즉 형의 수련문화가 전승되는 시기가 이때부터이다. 이러한 에도시대의 형지향주의는 검술뿐만이 아니라 다도(茶道), 노(能)와 같은 방식에도 적용되었다.
유교는 무사들의 생활윤리에 바탕이 되었으며, 도쿠카와시대에 이르기 이전에 선(禪)은 그 유교 윤리적인 의무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태세, 즉 숙명론적 사생관(死生觀)을 기르는 훈련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볼때 무사들에게 있어서 선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쟁과 일상적 삶에서 충성심과 용맹성을 기르기 위한 수단적 사상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쿠앙(澤菴)과 같은 선승(禪僧)들에 의해 제시된 무사들을 위한 선불교적 사상의 특성을 King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승려들이 사무라이에게 제공한 무사적 선(warrior-zen)의 주요핵심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선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전투중에 죽음을 직면하여서도 아무 흔들림이 없으므로써, 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무사를 만들 수 있느냐에 문제이다(King W.L., 1993:175-176)

이러한 King의 주장은 무사들이 가장 먼저 전투에서 이길수 있는 정신력을 찾았다는 실용주의적인 요소를 선에서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무예는 전쟁기술에서 성립되어 발전하였지만 에도시대에 접어들면서 단순히 살인의 기술이라는 영역을 넘어, 그것을 수행한다는 것 자체에 가치를 두고, 그 수행 과정에서 자기의 심신을 연마하는 '悟'라는 경지에 이른다는 고도의 운동문화로써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키워져 왔다(前林淸和, 용인대검도연구실 譯, 1998:36).
도쿠카와 막부시대의 검술은 초창기에는 진검수련이었으나 실제 전투가 없었을 시에는 형(型)혹은 본(本)연습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형과 본위주의 수련은 다양한 유파를 낳게 했고, 검술을 배울 수 없었던 계층의 사람들에게까지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이 당시에 많은 무사들이 새로운 직업으로 검술을 지도하는 기관이나 사범으로서 일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스티븐 캐페너, 1998:50-51).
일본무예는 전국시대의 기풍이 남아있던 에도시대 전기에 융성했지만, 세상이 태평해짐에 따라 상무의 기풍도 점차 쇠퇴해졌다. 그때까지의 검술의 훈련은 실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형의 약속훈련으로 수련되어 왔는데, 유사한 상황하에서는 형의 훈련은 실전적 긴장감이 없고 형식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화법검도(華法劍道)'는 많은 비판을 받으며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6세기 말에 성립된 일도류(一刀流)나 신음류(新陰流)는 실전검법을 탈피하였다. 에도시대의 검술계는 통일성을 갖지 못하고 혼돈상태이다.
한편, 이 당시의 무사신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봉건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의 기본의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사의 신분이 어떻게 구분되고 있었는가라고 하는 문제는 그동안 다루지 못했다.
 예를 들면 '무사의 급료'에 적은 대장을 지키는 무사가 200석 이상, 무사의 신분을 결정 짓는 관직의 등급(官位)·가문의 품격(家格)·녹(祿)·직무(職務)에 대해서 취했다. 이 4개의 사항은 서로 서로 관련해 신분을 결정했는데, '상대에 대한 호칭', '복장', '집의 구조', '에도성내의 힐소(詰所)', '외관때의 취급' 등 세부에 이를 때까지 격식이라는 굴레의 무사의 생활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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