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태권도선구자, 노승옥사범

2012. 11. 29. 15:07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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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옥사범, 조경행사범(우)

노승옥.

이름 세자와 그의 신문기사내용만을 들고 이집트로 갔다.
이집트에 태권도를 처음 보급한 사범. 그는 유학생이었다. 일정 3일째 어렵게 한인들을 통해 그의 이집트 삶을 알 수 있었다.

1974년 이집트로 유학을 갔던 노승옥 사범과 조경행사범은 1978년까지 개인자격으로 이집트에 처음 태권도를 보급했다. 이 계기로 이집트는 1978년 태권도협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세계태권도연맹(WTF)에 가입하게 되었다.

20121119일 카이로의 마디의 한인식당인 가야(Gaya)에서 노승옥사범과 께 유학준비를 같이하고 이집트에 함께 입국해 태권도를 지도했던 조경행 사범을 만났다.

조계행사범을 만나기전 1984년 정부파견으로 이집트에 진출한 정기영사범의 인터뷰중 노승옥사범과 동거동락을 했던 조계행사범의 연락처를 알게 됐다. 저녁시간, 사업가로 성공하고 한인회 회장도 역임한 조계행사범은 이집트 카이로지역에서 태권도가 아닌 한인사업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만나자 마자 자신이 20대후반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진출을 꿈꾸던 1970년대로 돌아갔다.

조경행사범은 충북 청주출신으로 명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업가를 꿈꾸는 청년이었다. 특히 해외진출을 위해 고민하던 중 해외에 나가서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가장 많이 준비했던 것이 병아리 감별사와 보석감정사 자격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태권도 단증이 있으면 해외에 나가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던 시절이었다.

조경행사범은 1972년 지금의 서울역(서부역) 부근에서 종근당 사옥건물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태권도 송무관을 찾았다. 그곳에는 이미 해외진출을 꿈꾸던 일부 수련생들이 있었다. 강원식 현국기원원장과 곽기옥사범 등이 있었고, 노승옥사범은 사범자격의 실력임에도 유단자로서 함께 수련하는 위치에 있었다. 조사범은 노승옥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웠다. 그 당시 29세 동감내기였으며, 함께 태권도를 배운 이는 윤창영, 이용근사범이 있고 후배들로는 사우디에서 태권도를 지도했던 이희윤사범과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이양환 사범이 있었다. 윤창영사범은 노승옥사범과 조경행사범보다 먼저 모로코로 유학을 떠났고, 이희윤사범은 사우디에 진출해 태권도를 지도하다가 지금은 두바이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양환사범은 1978년 사우디로 사업차 진출한 노승옥사범의 초청으로 사우디로 진출하고 사우디 한인회장도 했다.

노사범과 조사범은 태권도를 배우고 이집트 유학을 결정했으며, 유학을 하게 된 이유는 아랍권에서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197325일 카이로에 도착, 태권도를 지도한다. 초기에는 알아즈하드대학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카이로대학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했다.

입국하자마자 아메리칸대학교(AUC)에 들어가 태권도를 보급할 무렵, 이소룡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런 이유에서 가라테와 쿵푸는 이집트 젊은이들에 호감을 얻고 있었고 이미 기득권 무술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존 가라테 수련생이 가장 많았던 시절인 만큼 태권도는 무슨 운동인지 모르고 대부분 이집트인들은 태권도를 보고 가라테라고 말했다.

짧은 기간내에 태권도가 가라테인들에게 알려지면서 가라테측으로부터 도전이 들어왔다. 가라테로 이미 명성을 알리고 있던 오카토 사범이 지도하고 있는 도장에서 들어온 도전이라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도전을 거부할 수 없어 수락했다. 하지만 그 뒤 가라테측은 답이 없었고, 이런 일을 계기로 소문이 알려지자 많은 가라테수련생들이 태권도로 전향했고, 이런 과정에서 가라테사범으로부터 사업제안이 들어 왔다. 이집트 가라테 산하로 태권도가 들어오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가라테 도장에 태권도가 소속돼 경제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노승옥사범은 단연 거부했다. 노승욱사범의 성격은 상당히 도전적이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19744월에 ‘American University Cairo, AUC)'에 들어가 태권도를 지도했다. 19749월부터 AUC기숙사에 입사했으며, AUC 강사로 채용돼 장학금 8파운드일때 당시 강사비 20파운드와 각 클럽에서 20파운드(파운드대비 달러 0.4)를 받으며 유학생이지만 태권도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 6월에 게지라클럽, 10월 슈팅클럽, 19753월에는 경찰대학에 태권도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미 이런 대학과 클럽들에는 가라테를 하고 있었고 태권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초기에는 가라테를 태권도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특히 베이루트에 오카모토 가라테사범이 유명해 그를 경쟁상대로 삼았다. 워낙 유명한 사범이었고 일본에서 지원하는 사범이었다. 오카모토사범은 식당을 해 많은 돈을 벌었으나 카지노해서 망했다. 이런 오카모토와는 한인인 남사장과 친분이 있었다. 남사장은 원래 일본어를 잘해 오카모토의 가라테측과 큰 갈등을 없애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AUC태권도수련생 1974


이러한 안정기를 맞이 하기까지 노사범은 모든 프로그램을 직접 짰고, 태권도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태권도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유학과 사업을 위해 이집트를 왔지만, 태권도보급은 한국을 알리는 계기라는 점과 아랍의 기득권을 빨리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사범은 경찰대학 총장을 이집트태권도협회장으로 만들어 노사범과 회장이 1976년 서울을 방문했다. 1976년 설립된 이 연맹은 비공식 연맹이기는 하였으나, 서울과 국기원방문해 이집트에 태권도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은 AUC와 경찰대학출신들의 제자들의 헌신적인 역할들로 태권도보급의 안정기를 맞게 한다. 그 중에서 알라자키(사무총장, 경찰, 친한파)는 협회의 조직력을 위해 노력했고, 검찰청의 검사인 파티누르(Fathnour)가 태권도보급에 상당히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노사범과의 조경행사범은 초기 이집트 태권도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사범은 1977년 사우디를 다녀온 뒤 사업을 시작했고, 1978년에는 사우디와 이집트를 오가며 태권도보급과 사업을 병행하다가 1979년 완전히 이집트의 생활을 정리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최근 노사범의 제자 14명이 이집트에서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노승욱사범은 사우디아라비에 진출해서도 태권도보급과 사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88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경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해 이집트 현지 태권도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가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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