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에 나온 최현미선수

2010. 5. 20. 16:45Report/Good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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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womennews.co.kr/news/45230

그녀의 하루
WBA 여자 페더급 세계 챔피언 최현미 선수
“링은 외롭다. 그러나 짜릿한 성취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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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합이 없는 기간에는 여느 대학생처럼 먹고싶은 것들도 맘껏 먹을 수 있다. 교내 카페에서 와플을 즐기고 있는 최현미 선수. © 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새벽 6시, 챔피언의 하루가 시작된다.

학교 기숙사에서 눈을 뜬 최현미(20) 선수는 1시간가량 교내 트랙을 달린다. 365일 중 며칠을 제외하곤 매일같이 러닝(running)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4월 30일 3차 방어에 성공하고 회복 중이라 요즘의 러닝은 가볍다. 시즌에 들어가면 아침에만 10㎞를 뛰어야 한다. 러닝을 마친 후 학교 선수촌 기숙사에서 아침밥을 먹고 빡빡한 수업 시간표에 맞춰 강의실로 향한다.

10학번 새내기 챔피언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페더급(57.150㎏) 세계 챔피언인 최현미 선수는 올해 3월 성균관대학교(수원) 스포츠 과학부에 입학한 10학번 신입생이다. 개강한 지 두 달이 넘었고 중간고사 기간도 지났지만, 최 선수가 누린 캠퍼스 생활은 3주에 불과하다.

지난달 30일 클로디아 로페즈(아르헨티나) 선수와의 3차 타이틀 방어전으로 훈련에 매진하느라 신입생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최 선수는 2008년 10월 WBA 챔피언 결정전에서 쉬춘옌(중국)을 꺾고 챔피언이 된 후 지난해 11월 일본의 쓰바사 덴쿠를 상대로 2차 방어에 성공한 데 이어 로페즈 선수를 이김으로써 3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이번 주는 학교 축제 기간이다. 최 선수는 와플과 달콤한 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를 들고 캠퍼스 곳곳에 설치된 학생들의 행사 부스를 둘러본다. 시즌 때는 손도 못 대는 음식이라며 맛있게 먹는다. 시즌이 시작되면 한 달 반에서 두 달가량을 소량의 고칼로리 식사(주로 육류나 회)를 한다. 단시간에 체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는 수분량도 줄인다. 쉽지 않다.

▲ 링을 내려오면 복싱 선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성스럽다. © 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야구공을 던져 캔 탑을 쓰러뜨리는 기계공학과 학생들의 부스가 왁자하다. 자꾸만 탑을 피해가는 공이 최 선수의 승부욕에 불을 놓았다. “한 번만 더”를 외치며 강속구로 탑을 무너뜨리고 나서야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멀찍이서 환호하던 남학생들은 그제서야 챔피언인 최 선수를 알아보고 사진과 사인 공세를 퍼붓는다.

최현미 선수는 평양 출신 소녀 챔피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MBC TV 연예 프로그램인 ‘무한도전’ 출연으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링 위에서의 레게 머리 챔피언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긴 생머리 아가씨는 낯설기만 하다. 레게머리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경기 전날 레게 머리를 만들고 경기 다음날 푼다. 4명의 헤어 디자이너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3시간 넘게 걸리는 작업이다. 머리를 촘촘히 땋는 레게 스타일은 그녀에게 경기에 임하는 다짐이자 의식이다.

“일단 강해 보이잖아요. 경기할 때 긴 머리가 치렁치렁하면 시선을 가리기도 하고, 집중력도 떨어지죠.”

훈련과 인터뷰 등으로 많이 출석하진 못했지만, 최 선수는 학교 공부가 재미있다. 특히 스포츠와 관련된 스포츠 사회학이나 스포츠 전문용어 같은 과목은 더욱 애정이 간다. 인체해부학 시간은 촬영 때문에 출석하진 못했지만, 진짜 시체로 수업한다고 해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긴다. 시합 일정과 겹쳐서 중간고사를 한 과목도 치르지 못했지만 3차 방어전 이후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교수님과 친구들이 축하의 박수를 보내준다고 한다.

가끔 휴강일 때면 친구들과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이나 구기운동을 한다. 스포츠과학부 학생들이라 다들 운동과 체력에 재능이 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전날 밤에 과음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도 선배들이 새내기들을 새벽에 깨워 뜀박질을 시켰다. 추운 겨울 새벽에 남학생들은 윗옷을 벗고, 여학생들은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로 달렸다. 역시 스포츠학과라 다르구나 싶었단다.

세계 챔피언은 스무 살

▲ 최현미 선수가 학생들을 위해 사인을 하고 있다. © 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보통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쯤 최 선수는 다시 챔피언으로 돌아간다. 수원에서 서울 광진구 군자역 근처 동부은성체육관에 도착하면 6시가 넘는다. 2시간 정도 스파링과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울면서 뛰기도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익힐 때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기술은 계속 익혀도 끝이 없어요. 복싱의 새로운 기술을 익혀 링 위에서 그 기술을 제대로 썼을 때 너무 좋죠. ‘아싸~! 나이스~! 이거 이제 내 기술이다’ 그런 즐거움 때문에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술이 하나씩 자기 것이 될 때마다, 지독한 훈련의 고비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그녀의 자신감도 쌓여간다. 자신에게 혹독했던 만큼 링 위에 올라갈 때 웃을 수 있다.

“저는 링에 올라갈 때 자신 있어요. 늘 웃으면서 올라가요.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요. 저 자신을 믿는 거죠. ‘난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주문을 걸어요.”

그녀의 남다른 정신력은 경기 중에 더욱 빛을 발한다. 순식간에 얼굴이 부어오를 만큼의 펀치를 맞고도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다.

“맞았을 때 아프죠. 충격도 있고요. 아프다는 생각과 동시에 ‘다음엔 이걸 맞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해요. ‘어떤 주먹을 내야 적중할 수 있을까’도 고민해요. 맞으면서도 생각을 해요. 엄청난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곳이 링입니다. 쉬는 시간에는 링 바깥의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땡’ 하고 시합이 시작되는 순간 상대밖에 보이지 않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응원하는 순간에도 혼자 싸워야 하는 선수는 외롭다.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인 그녀임에도 시합이나 훈련은 혼자 하는 시간이 많아 항상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체력적인 어려움보다도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다.

“어릴 때부터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지만 늘 바쁘게 지내면서 또래에 비해 너무 힘든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도 들어요. 함께 경쟁할 수 있는 라이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4월 30일 3차 방어전에서 승리한 후 두 손을 들어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 © 동부은성체육관 제공
특히 여자 복싱 선수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최 선수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욱 크다. 복싱이 남성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라는 그녀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여성 복서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체육관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늦은 밤 다시 수원 기숙사로 돌아온다. 학업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고 있어 노원구에 사시는 부모님은 주말에나 뵐 수 있다. 연세대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는 오빠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 서울에서 지내는 주말에는 잠시 짬을 내 친구들과도 어울린다.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나 2004년 7월, 14살 때 서울에 정착한 최 선수는 녹천중학교와 염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기를 앞둔 시즌 때의 일상은 훨씬 단조롭다. 아침에 10㎞를 뛰고, 식사하고, 2시간쯤 쉰다. 오후 2시부터 다시 운동 시작, 휴식과 식사, 저녁 6시부터는 야간 운동이다. 경기를 앞둔 때는 학교생활은 잠시 접고 서울의 체육관 근처에서 합숙을 한다. 자신은 집이 많다고 말하는 스무 살 챔피언의 빡빡한 일상이 엿보인다.

“복싱은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여자도 동등하게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여자로 예뻐 보이고 싶어서 시합복에도 신경을 많이 써요. 굳이 여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링 위에서 그냥 저 자신으로 당당해요.”

스스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는 최 선수는 ‘열심히 꾸준히 하라’는 말이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갓 스무 살을 지나고 있는 그녀는 지난 10년간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 온 챔피언의 당당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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