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였다.

2010. 10. 4. 11:57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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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4월 신민회(新民會) 회원인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의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싼위안바오[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을 합친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퉁화현[通化縣]의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한 뒤 이듬해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였다. 신흥중학교는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얼마 뒤 중학반은 지방 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에 전력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류허현 제3지구의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하여 신흥중학교를 발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당시 교장은 이세영(李世永), 부교장은 양규열(梁圭烈), 학감은 윤기섭(尹琦燮), 훈련감은 이장녕(李章寧) 등이었다. 교관은 본교 졸업생인 박두희(朴斗熙)·성준용·백종렬(白鍾烈)·오상세(吳祥世)·원병상(元秉常) 등이 맡았다. 그리고 퉁화현의 쾌대모자(快大帽子), 린장현[臨江縣]의 토애(土崖), 하이룽현[海龍縣]의 성수하자(聖水河子) 등지에 분교를 두었다.

교육과정으로는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과정 등을 두었고,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친일 주구배(走狗輩) 주살 등 독립전선의 각 분야에서 활동했다. 3·1운동 뒤에는 지청천(池靑天)·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입학지원생도 늘어났으나 일제의 가중되는 박해와 잇단 사고로 1920년 가을에 폐교되었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생도 300여 명을 이끌고 백두산 지역의 안도현[安圖縣]에서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金佐鎭) 부대를 뒤따라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광복 후인 1947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을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하였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이 되었으나 6·25전쟁 때 조영식(趙永植)이 인수하여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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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옛터의 교사는 이제 옥수수밭으로, 연병장은 볏논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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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는 초등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20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 일제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의 기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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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이 설립한 학교 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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