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유도중앙도장(3)

2010. 4. 22. 13:48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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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성회장, 합리적 방안 모색제시

1991년 특위가 해산되고 유도회와 유도원의 경영권 논쟁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도회의 박용성 회장은 1992 대의원 총회에서 전격적인 제안을 한다. 당시 <한국유도 발전을 위한 제안>은 대의원회의에 참석한 각 시도대의원들과 ‘유맥회’라는 올림픽과 세계대회 메달리스트들의 모임인 소장 유도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조처로 평가받았다.

이 제안은 1991년 대의원총회의 위임을 받아 유도회와 유도원의 통합을 추진해 온 9인 특위 활동의 무산과 해산을 계기로 기존방식으로는 통합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다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한 박회장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박회장은 시가 200억원에 이르는 유도원의 자산을 두고 유도인들의 이해관계에 개입을 꺼려 유도계의 현안에 무관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박회장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당시 주무부서인 체육청소년부와 대한체육회, 그리고 법조계의 자문을 얻어 전격적인 제안에 나선 것이다.

이 제안은 박회장과 박회장 측근 인사들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것으로 후에 알려졌다. 이것은 유도회와 유도원이 각기 해산을 통해 새로운 법인체의 설립에 동의할 경우를 전제한 조건부 제안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1.각자 해산 2.양단체 자산의 국고귀속 3.귀속재산의 환수를 위한 대정부 접촉 4. 한국유도협회(사단법인)창설로 요약된다. 이러한 제안내용중 양단체의 해산 및 청산절차는 민법에 따라 시행되며 유도원 자산의 국가귀속은 유도원의 정관 제13조 1항에 근거한 것이다. 이 안에 따라 유도원도 해산에 동의할 경우 실무추진단계에서 체육청소년부와 재무부 등 유관부서의 의사를 타진한 후 정부 귀속재산을 가칭 사단법인 한국유도협회가 증여받는 순서로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안은 유도회 대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유도원측에 1992년 2월말까지 가부 여부결정을 의뢰했다. 또,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체육청소년부의 중재역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원측은 건물 신축 추진위원회를 예정대로 개최하고 고단자 회의를 소집하는 등 변화가 없었다. 결국 유도원측은 2월말에 양단체의 통합안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유도회에 공식 통보한다. 당시 유도원측은 공문을 통해 유도회의 제안에 대해 연구, 검토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법인의 설립목적 및 사업의 이질성을 감안할 때 동의할 수 없고, 유도원의 합리적인 경영방안을 모색해 목적사업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특히 유도회에 대해서도 유도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함으로써 통합에 대한 사실상 협상을 거부했다.


갈등의 반복, 소장파 유도인들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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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센터로 탈바꿈한 유도회관
이러한 통보를 받은 유도회측은 1992년 3월 양단체의 통합안을 대비해 총사퇴했던 집행부를 다시 새로 구성한다. 새 집행부는 종전임원들을 그대로 재기용하였으나 유도원이사장이 겸직했던 채중겸 부회장(국내담당)의 공석을 김정행 전무이사가 대행하고 김동규 유도원이사가 맡았던 여성이사에 영화배우출신 윤양하를 선임한다. 조직개편이 이루어진 유도회는 양단체의 통합문제에 대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이후에 재론하기로 하고 올림픽메달전략수립에 전념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유도원측이 스포츠종합센터 건립 등의 무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에 대해 유도회에서는 사전 저지차원의 법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의견도 팽배했다. 하지만 유도원측도 당시에는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올림픽이후의 논의에 대해 다시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올림픽이후 1992년 9월 유도원의 신축문제를 놓고 유도회와 유도원은 신경전이 이루어진다. 유도원측이 유도회와의 단체통합을 무시하고 대지 6백평의 유도회관 자리에 지상 8층 지하 6층(연건평 5천2백22평)규모의 '여의도 종합스포츠센터'를 착공을 시도한다고 유도회측은 저지를 위한 3개항의 결의문을 유도원측에 전달한다.

이 결의문은 △구체적인 자금조달계획을 수립하고 △각 시, 도지부가 추천하는 양식있는 유도인을 건축추진위원에 포함시켜야 하며 △사업계획을 공개리에 추진할 것 등이다. 30만 유도인의 자산이자 유도계의 해묵은 숙제인 유도회관 문제가 유도원측의 신축강행으로 양단체간 실력대결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유맥회(柔脈會)'(회장 장은경) 등 소장파 유도인들은 각 시도지부를 망라한 '유도회관신축저지 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전국 유도인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계획을 세우는 등 실력저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도원측은 원로 유도인들을 건축추진위에 포함시키고 법인의 성격이 다른 유도회에 알리지 않고 있을 뿐, 감독기관인 서울시 교육위에 추진계획을 보고 하고 있어 사업을 공개하고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당시 유도원측이 밝힌 자금조달계획은 공사 진척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눠 회원권 1구좌당 1천만원씩 모두 1천5백명의 회원을 모집, 1백50억원을 조성하고 나머지는 사무실 임대비용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유도회측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유도원측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서로간의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또한 주무부서인 체육청소년부역시 조정뿐만 아니라 직접 개입을 꺼렸다.


법인설립과 유도원 신축공사의 대립

한편,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정부는 체육단체의 법인화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정부는 자체기금 10억 이상을 확보하고 재정자립도가 50%를 웃도는 단체를 법인화한다는 계획을 세웠왔다. 그러나 이에 해당되는 체육회 가맹단체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만, 유도회는 여의도 유도회관의 자산가치 때문에 1차법인화 대상이었으나 통합결렬로 기금비축이나 재정자립도를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9월에 유도원 신축공사 입찰이 시작된다. 럭키, 우성, 대림 3개사가 참가한 가운데 신축공사 입찰을 시작했으나 대금지불조건 등으로 유찰된다. 그 뒤 또 유찰되고 제3차에서 응찰회사 5개사 중 신우건설이 1백39억 6천만원에 낙찰된다. 당시 도급순위 220위의 중견업체인 신우건설과 1주일 이내에 계약을 체결키로 함으로써 신축공사를 강행했다. 두 차례의 유찰에 마음을 놓고 있던 유도회측은 이날 낙찰 소식이 전해지자 놀라게 된다.

공사대금을 스포츠센터 회원권 판매(1구좌당 1천만원)와 사무실 임대비로 충당하겠다는 유도원측의 계획이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으로 공사비 결제에 차질을 빚을 경우 전체 유도인의 자산인 유도회관 부지를 모두 날릴 수도 있다고 지적해 왔었다.

유도원은 유도회의 양단체 통합제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해 온 신축공사는 전 유도인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유도원 이사진과 일부 원로 유도인들 만으로 추진돼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도계는 유도회에 대한 재정지원과 유망주들의 장학금 지급, 유도인의 후생복지 등을 내세운 공사목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유도원은 1992년 12월 3일 ‘여의도종합스포츠센터' 기공식을 갖는다. 유도원측의 본격적인 실력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유도원측은 1993년 유임의사를 밝힌 박용성회장을 자진사퇴시키기 위해 유도원을 중심으로 한 원로급 유도인과 서울, 경북, 경남을 주축으로 하는 대의원들이 힘을 모은 새회장 추대설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총회막판까지 회장후보를 추천하지 못하고 박회장은 다시 만장일치로 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이 총회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유도회와 유도원의 대립이자 야심 있는 소장파와 욕심 많은 원로들의 대결양상을 띠는 유도계의 치부라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원과 유도회는 별개의 단체로 1994년과 1995년을 보낸다. (계속)

원문보기 http://www.mookas.com/media_view.asp?news_no=11420&pidx=&ucc_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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