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유도중앙도장(2)

2010. 3. 21. 22:09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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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비리 전경환배경과 A씨의 유도원 관선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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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새마을’비리가 연일 터지자 유도계는 긴장을 하게 된다. 5공 당시 새마을 비리의 주인공으로 부각된 전경환은 한국유도의 막후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유도회는 물론 유도원, 유도학교 등 유도계의 주요 현안에 관여해 왔다. 서울올림픽을 5개월여 앞두고 새마을비리가 불거지자 전 씨 체제 때 소외당했던 원로급 유도인사들은 유도회 집행부를 비롯한 유도원에도 불신을 갖기 시작했다.

전경환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1980년 9월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임되면서 체육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체육계 일부에서는 전경환을 체육회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으며, 한국체육행정을 좌지우지할만한 막강한 인물로 부상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이런 전씨는 유도계에 직접 영향력을 미치기 보다는 당시 한국유도원 A 이사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A씨는 유도학교 교장을 비롯해 관선체제에 있던 유도원에 5공 중기가 넘어선 1985년 2월 이사장까지 맡게 된다. 그는 당시 싯가 60억원이 넘었던 유도원을 내부분규를 틈타 관선 이사장직에 오르며 유도원을 접수한 것이다.

이후에도 각종 소송 등을 승소하며 그의 영향력은 지속됐다. 당시 A원장의 라인들은 유도회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A원장은 유도회 실무 부회장으로 상당히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1986년 1월 박용성 당시 OB사장을 회장으로 영입할 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본부나 유도계를 통해 체육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비리가 불거졌다. 당시 이 비리들은 전씨 보다는 주변 인물들이 그를 내세운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은 전씨를 마치 핵심인물로 떠받치며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신, 기금조성, 호화판 체육행사 등을 통해 얻어지는 단맛을 즐겼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전씨가 내세운 사회체육정책은 당시에 체육행정에서 소외된 부분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체육기금조성을 위한 성금강요나 막대한 국고낭비 등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유도회, 유도원통합 역제안 나서지만 실패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8월 유도원의 이사장에 송학준씨가 선임된다. 이 집행부를 계기로 유도원이 5년간 관선체제에서 민선이사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정상적인 이사체제의 운영에 돌입하는듯 했다. 신임집행부는 유도원의 그림을 바꾸는 전략을 쓴다. 바로 재벌그룹에 의지해 오던 유도회의 재정을 자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도원이 건물임대료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유도원 2층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20층에서 25층 사이의 건물을 짓는 것과 이 건물을 팔고 서울근교에 고층건물을 신축해 임대료를 유도회 운영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두가지 안을 제시한다. 결국은 부동산임대업을 통해 유도회의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도원의 계획에 대해 유도회는 서서히 힘겨루기를 시도한다. 바로 유도원이 관선체제를 탈피하기는 했으나 5공 관선 이사가 포진된 것에 대해 고단자(6단이상)들의 불만이 크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유도원측은 이미 싯가 2백억원이 되어 버린 중앙도장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태세로 맞섰다.

이런 분위기가 오고 가고 유도회측은 유도원과의 통합 법인을 통해 유도원 건물을 고층빌딩으로 신축, 임대료 등으로 재정자립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에는 정부에서 대한체육회 산하단체들의 법인화를 시책에 힘을 얻으면서 유도회가 법인화될 수 있다는 근거로 설득력을 발휘한다.

1991년 1월 29일 유도회는 올림픽회관에서 정기대의원총회를 열고 유도원 흡수통합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참석 대의원 22명은 임의단체인 대한유도회와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이 국내에서 별개의 단체로 알려져 있다는 점과 경기단체의 법인화시책을 내세운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며 유도원을 압박한다. 이를 통해 유도회, 유도원, 중앙대의원 각 2명씩 6명과 유도고단자회 3명으로 구성된 9명을 특별위원회로 구성해 유도회와 유도원을 통합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한다.

1991년 2월 5일 유도회는 올림픽파크텔에서 9인 특별위원회를 열고 유도원 9명의 이사에 대해 자진사퇴를 권고키로 결의한다. 한국유도원에는 한명의 이사를 제외한 8명의 위원이 참석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이 특위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한다.

1991년 7월 13일 특위는 유도회 이사로 4명의 유도원 이사를 영입하고 유도원도 유도회가 추천하는 4명의 유도인을 유도원 이사로 서로 교환하도록 결의하지만 통합의 실마리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유도회의 박용성 회장과 집행부가 사퇴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유도회와 유도원의 통합을 설득하지만 이 특위는 9개월만에 해체된다.

1991년 10월 22일 제5차 회의에서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이견만이 난무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회합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9명의 위원중 5명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유도원 이사장겸 유도회 부회장과 유도회 전무이사는 "양단체의 이사 4명을 교환 영입한다"는 특위 4차회의의 합의사항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에 대해 쌍방의 책임만을 물을뿐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사실상 특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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