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성립기 관(館)의 특성

2010. 2. 3. 00:52Report/Martial Arts

728x90
반응형

이 자료는 2002년도 강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당시 연구논문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임.
참고문헌이 없어 연구자들에게는 양해를 바랍니다. 

해방이후 한국 태권도는 일본의 당수의 유입,명칭과 기술의 변화,경기를 통한 스포츠화,그리고 해외진출에 의한 세계화 등의 많은 변혁을 겪었다. 일본 당수의 유입사실은 해방이후의 태권도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충분한 선행연구들은 발견할 수 없으며, 태권도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당수 유입과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여 왔다. 오히려 근대태권은 전통적 무예임을 주장하며 정통성을 갖고자 하였다. 근대태권의 지도자들은 당수라는 기존의 틀을 통하여 태껸을 평가하려 하였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적극적인 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 태권도는 근대태권에서 경기태권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긍정적·부정적 시각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이것은 한국 태권도의 급격한 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국화 과정의 산물이다.

근대태권에서 경기태권으로 이행

해방과 함께 귀국하게 된 많은 일본유학생들 속에는 일본의 당수를 수련한 이들이 있었다.이들은 귀국과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기존의 체육시설을 이용하여 당수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수, 공수, 권법 또는 카라테로 불리면서 발전해 나갔으며,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 무술을 한국화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이들은 이 무술이 그 역사적 맥을 일본에 있지 않음을 주장해야 할 당위성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카라테는 전통무술로서 탈바꿈 하게 되었고, 태권도가 국기로서 채택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코자 노력하였다.그리고 전통성의 회복과 독자적인 기술체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경기화와 세계화 과정에서였다.따라서 한국 태권도의 발전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국화의 추구

해방 직후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원국의 청도권, 노병직의 송무관, 윤병인의 YMCA권법도장(후에 창무관), 전상섭의 연무관(후에 지도관), 황기의 무덕관, 이 근대무술의 모체가 된 5파가 모두 일본에서 무술을 배운 사람들이 해방전 후 귀국하여 가르치기 시작한데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태권도의 모체가 되는 관의 체계는 일본유학생들이 주축이었으므로 일본무술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점차 도장의 체계가 갖추어지고 관의 체계가 정비가 되면서 1960년대에는 전통무술이라는 역사성을 주장하게 되었다.70년대에 이르러 태권도가 국기로서 채택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노력하였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주로 손덕성,최홍희 계열의 청도관,오도관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용어다.1955년 4월 11일, 최홍희는 ‘태권도(跆拳道)’라는 말을 채택했으나,당시 당수(唐手),공수(空手),권법(拳法)등을 고집하던 타관의 반발 때문에 1961년부터 1965년 8월까지는 ‘태수도(跆手道)’라는 말이 잠정적 타협명칭으로 쓰였다.1965년 1월에 최홍희는 태수도협회회장이 되었고,같은 해 8월 5일 자신이 창안한 대로 그 공식명칭을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태권도는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화의 노력은 일본의 카라테와 구별 짓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기술 분야는 외면적으로는 형이라는 기술유형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형에 집착함으로써 단지 순서의 재정립에 그치고 말았다.1950·60년대 태권도의 한국화 추진은 실질적으로 크게 일본의 카라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단지 일본의 카라테 와 구별지울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켰다는데 그쳤다.

경기화의 추진과 국제화

근대태권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술에서 경기로서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동아시아에서 무술의 경기화는 서양의 스포츠 문화를 접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일본의 검도는 18세기후반부터 경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본격적인 경기는 정도관 유도 시합규정이 정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경기화는 조선시대 후기의 택견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조직적인 스포츠의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한국 태권도의 경기화는 이보다 휠씬 늦게 출발된 것이다. 1세대 지도자들이 일본 당수에서 행하던 촌지방식(寸止方式)112)으로 겨루기를 하였다. 그러나 2세대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직접 타격을 행하는 방식을 택하고,발기술 중심의 겨루기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다.그들은 태권도가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스포츠로 전환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경기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대한 체육회에 정식가맹 단체로 가입될 수 있고 그것이 유사단체들 간에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며 또한 이들을 결합시 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경기화를 위한 규칙제정은 스포츠의 규칙인 공정성 확보,안전의 보장,운영의 효율성,흥미의 제고 등을 무술의 성격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따라서 기존의 촌지방식은 경기를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기준과 방법,스포츠의 흥미유발에 한계가 있었다.그러나 태권도는 호구의 착용과 완전한 타격방식을 선택하였으며,기술적으로는 손 기술을 억제하고 발기술을 장려하는 규칙을 제정하였다.

또한 몸통득점과 얼굴득점을 구분하여 차등 득점제를 채택함으로써 화려한 기술을 중요시하였다.

일본 공수의 경기화의 노력은 동경대학 권법부에 의한 완전히 몸을 보호하여 대련을 하는 방식을 시도(1930)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권법부의 대련방식은 미미하였다.그 이후 과감하게 시도된 극진계의 무방구(無防具)직접시합(直擊試合)과 같은 유형도 나타났다.결국 공수는 촌지방식이나 형식중심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면에 태권도는 형식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경기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던 점이 다르다 하겠다.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 태권도는 당수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형 수련의 중점을 양적 측면에 두고,격파나 차기에 주력하며,겨루기를 중심의 연습경향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60년대 중반이후 경기태권이 나타나게 되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져 차기 기술 중심의 겨루기 위주로 변하게 되었다.즉 카라테는 무술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술발전을 꾀했던 점120)과 달리,한국태권도는 오직 경기 자체에서 유효한 기술의 개발에 모든 노력을 쏟음으로써 오늘의 높은 경기수준을 갖출 수가 있었다.

기술발전의 또 다른 요인은 경기태권 전문수련체제로서 태권도팀의 발생이다.선수들만의 집중적인 기술훈련은 기술발전에 큰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발전의 결과는 세련된 새로운 차기기술도 많이 개발되어, 발등으로 때리는 기법의 개발과 동체의 회전력을 이용하는 방법의 발전 등으로 이어 지게 되었다.또한 기술의 기본 구조를 바꾸게 되었는데,방어·공격이 공격·공격에 쉽게 무력해진다는 것을 간파하고,방어와 반격을 하나의 기술동작에 융합시킨 받아차기의 기법이 개발되었다.그 결과 태권도 기술의 기본구조는 차기(공격)와 받아차기(반격)으로 변화되었다.이러한 경기태권의 형태는 겨루기 중심의 대인 겨루기 방법의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태권도의 경기화의 의미는 한국 태권도가 경기라는 과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당수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었고, 그 새로운 모습이 태껸의 형태와 성격이 많이 가까워 졌다는 점일 것이다.경기화는 태권도를 현대적인 스포츠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으며,태권도의 세계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