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기원은 축국(蹴鞠)

2010. 6. 13. 14:54Report/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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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현재 일본의 신사에서 과거의 축국을 하는 장면, 우측은 중국의 명대의「사녀도·축국」. 명대에는 귀족·관료들에게 축국 금지령이 내리져 여성의 유희가 되었다고 함.


축구를 서양에서 만든 경기라면, 이 축구이전에 동양에서는 축국(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축국의 한자사전의 의미는 "옛날 어린아이들이 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던 놀이. 공은 가죽 주머니로 만들어 겨를 넣거나 또는 공기()를 넣고 그 위에 꿩의 깃을 꽂았음"이라고 설명되어져 있다.

신라시대에도‘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가 농주(弄珠)를 가지고 노는 축국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둥근 공을 가지고 하는 놀이로 해석된다.

그러나, 북한학자들은 “장년과 소년들이 축국(蹴鞠)놀이를 하는데, 그것은 큰 탄환과 같고 거기에 꿩의 깃을 꽂아 두 사람이 마주서서 다리 힘을 겨루면서 놀았다. 이리하여 그것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속적으로 차는 사람이 잘하는 것으로 된다” 고 축국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제기차기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찼다거나, 새끼줄로 엮은 공모양을 찼다는 이야기는 어르신들에게 들어 본 적이 있다.

일본은 1400여년전에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축국이 유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속에서 축국이 지속적으로 장려되었고, 천황을 비롯해 막부시대의 주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그들은 축국도(蹴鞠道)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들어 축국에 대한 논쟁은 이것이 공놀이냐, 아니면 제기차기였느냐에 관심이 주목되는 듯 하다.

중국에서는 현대축구를 족구(足球)라고 부른다. 용어 통일이 동양에서도 안되고 있으니 축국도 공놀이나 제기차기를 모두 포함해 부른 것은 아닌지 한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여하튼, 골프도 추환이 먼저고, 폴로도 인도의 스푼폴로가 유래된 것이다. 서양에서 만든 것들은 죄다 동양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특히 고대 스포츠사에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축국에 대해서는 이미 인터넷 네이버 검색어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의 풋볼이 현대식 축구라면 축국은 동양의 고대 축구이다. 원래 중국 고대의 황제()라는 임금이 병정을 훈련시키는 놀이로 축국을 시작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당()나라 때 신라 ·고구려 ·백제에 전해져 일본에까지 퍼졌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하였으며, 당서()에는 고구려 풍속에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김춘추김유신이 축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축국은 시대에 따라 발달해서 경기 방법이나 규칙이 복잡해졌다. 공은 가죽주머니 속에 동물의 털을 넣어서 둥글게 만들거나, 돼지나 소의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서 찼다. 왕운정()의 《축국도보()》에 의하면, 구장()에서 하는 축국과 구장이 없이 하는 축국, 양쪽에 골문을 설치한 축국 경기 등이 있다. 일정한 구장이 없이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축국에는 1~9인장()까지 있다. 혼자서 차는 것을 1인장, 두 사람이 마주서서 차는 것이 2인장, 세 사람, 네 사람이 마주서서 차는 것을 3인장, 4인장이라 하며, 그 이상이 순서대로 서로 번갈아 돌려가며 차는 경기로서 공을 땅에 떨어뜨리는 사람이 진다. 오늘날의 제기차기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1∼9인장 놀이가 나중에 제기차기로 변해서 《재물보()》에는 축국을 ‘제기’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는 공을 차는 경기였으므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 축국은 2인장 축국이었다. 일정한 구장에서 하는 축국은 중국 한()나라 때 성행하였는데, 사면에 담장을 치고 구장 양쪽 끝에 각각 6개의 구멍을 파놓고 공을 차서 그 구멍에 넣으면 승부가 난다. 당나라 때에는 2개의 골문을 설치한 구장에서 축국을 하였다. 이 때부터 바람을 불어넣은 공을 사용하였는데, 경기 방식은 상부에 그물을 쳐놓은 대나무 2개를 세워서 골문을 만들고 편을 가른 2팀의 선수들이 상대편 골문 그물에 공을 차 넣으면 이기는 것이다. 옛날 축국은 팀의 인원 제한이 없이 양편이 같은 수이면 되었다. 2개의 골문을 설치한 축국은 오늘날의 풋볼과 매우 흡사한 경기였다. 한국에서는 골문을 세워서 한 축국의 기록은 없고, 조선시대에 2인장이나 3인장 같은 축국을 한 기록이 《동국세시기()》에 있다. “젊은이들이 축국 놀이를 하는데 공은 대포알만하고 위쪽에 꿩털을 꽂았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번갈아 차는데 땅에 떨어뜨리지 않아야 잘한다고 했다. 겨울부터 시작하여 설날에 많이 한다”고 쓰여 있다. 고려시대에 축국 경기의 모양을 무용 음악으로 만든 포구락()이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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