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학교는 무예학교?

2010. 1. 1. 12:53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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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는 동일인물인 정현석


원산학사는 1894년 원산소학교와 원산중학교로 분리되어 명칭을 변경한다(사진은 일제하 원산소학교)
무예에 대한 관심은 ‘어느 시대에 어떤 무예가 있었을까’에 있다. 무예를 교육했던 사실적 근거를 찾는 것은 우리 무예사에서 중요한 연구다. 우리나라 근대학교 중 원산학사(元山學舍)에 무예반이 있었다는 사실은 체육사나 무예사 연구에도 가끔 등장한다. 개신교의 영향으로 세워진 학교가 근대학교의 효시라는 반론도 있지만, 교육계에서는 최초의 근대학교를 1883년 함경남도 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元山學舍)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원산학사보다 5년 전 동래부(東萊府,부산에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동래무예학교(東萊武藝學校)’가 존재했다. 이 같은 사실은 무예사에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일이다. '동래무예학교'는 수많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베일에 가려져있고, 현재 체육사나 무예사에 한, 두 줄 인용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필자도 학부시절부터 동래무예학교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다만 학교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문헌이나 사료를 찾을 수 없어 깊은 관심은 갖지 않았다. 그런데 동래무예학교와 원산학사를 개교하는데 공헌한 사람이 정현석(鄭顯奭)이라는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에 몇 해 전부터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혹시 사료가 남아 있는 원산학사와 미흡한 동래무예학교의 연관성을 찾는 열쇠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다.

이 두 학교의 설립자인 정현석은 관(官)과 민(民)이 협조하여 근대학교를 설립했다. 사학(私學)형태로 무예학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시절에, 원산학사는 덕원부사(德源府使,덕원부 안에 원산이 있었음) 재직 시에 개교했다.

정현석이라는 인물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에 따르면 당시에 여러 부분에 뛰어난 관료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원군수를 시작으로 김해부사, 동래부사, 덕원부사에 이르기까지 지역민과의 유대관계가 뛰어나 고종에게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동래무예학교를 세우이기 이전인 1867년부터 6년여 동안 동래읍성 수축과 군사조련 등 유사시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위성척사론자로서 공이 컸고, 호국의지가 강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의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는 점에서 근대학교 개교에 대한 애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무예학교 개교이전에 향교에 대한 일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 서명을 하는 등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카스Tip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명을 담당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매일 기록한 것)


사격술, 궁술, 기추 종목 교육이루어졌을 수 도


동래부동헌

그렇다면 무예학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명확한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필자의 추측으로는 무예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동래부는 무청(武廳,치안과 군사를 담당하던 관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더불어 무예학교를 만든 정현석이 동래부사로 재직할 시기인 만큼 동래부 동헌(東萊府 東軒,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421-56번지 일원)부근의 시설을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당시 동래부의 경우 일반 군현과는 달리 국방의 요충지였던 지리적 특성상 무청은 중군청, 군관청, 교련청, 장관청, 수성청, 별무사청, 도훈도청과 같은 8청이 있었다. 소규모의 무청도 많았다는 점에서 무청 중 하나를 무예학교로 지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교육사 연구자들에게는 동래무예학교가 최초의 근대학교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다. 1980년 당시 차석기 교수(고려대)는 동래정씨의 족보와 대한제국의 관보를 통해 무예학교에 대해 발표 한 적이 있다. 차 교수가 당시에 주장한 내용을 보면, “무예학교 수료연한은 1년이었으나 후에 2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2년이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다만 다양한 교육과정과 일정한 학제 등이 근대학교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무예학교의 교과과정에 있어서도 문예반에서는 경서(經書)를 중심으로 교육했고, 무예반에서는 병서(兵書)와 사격술을 중심으로 교육했으며, 이들의 공통과목으로는 산술, 물리, 기술, 농업, 잠업, 광업 등 당시 필요한 모든 과목을 배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무예반은 하급장교 양성이 목적


개화기 별기군의 모습

차 교수의 주장이외에도 체육계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연구는 한양대 이학래 명예교수의 저서다. 이 교수는 차 교수의 주장을 포함해 무예반의 경우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芻,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교수의 주장에 있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교수는 어떤 문헌을 근거로 제시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기록 <승정원일기>에서 고종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기추(騎芻)에 있어서는 응시자가 흔하지 않거나 소수에 불과했다. 실시한다 해도 소수인원이 합격했고, 대부분의 시험이 응시자가 미흡했다는 점에서 과연 무예학교에 기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원산학사 무예반은 하급 장교인 별기군으로 선발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기추를 할 수 있는 여건이나 대상이 되었는지도 의문이다. 특히 이 교수가 주장한 종목은 1700년대 영조 때의 기록에 “월 1회(동하절기 6개월은 제외)의 궁술 시회(試會)를 열어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로 시험을 보고 성적에 따라 상벌을 주었다”는 기록으로 무과시험의 종목들이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무예학교의 무예종목과 동일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이 교수의 주장을 전면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논리일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무과시험에 ‘목전(木箭)은 세 발을 쏘아 240보 떨어진 곳까지 이를 것, 기추(騎芻)는 1차에 한 발을 명중시킬 것, 관혁은 다섯 발을 120보 떨어진 곳에서 쏘아 1순에 한 발을 명중시킬 것, 유엽전은 다섯 발을 120보 떨어진 곳에서 쏘아 1순에 한 발을 명중시킬 것’이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무예학교나 원산학사 무예반 학생들이 이를 준비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무예학교의 교과목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두 학교의 초대교장이 정현석이라는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당시 무예학교나 원산학사의 교과과정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당시 필요에 의해 무예반을 만들어 운영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예학교도 원산학사의 교과목에 준했을 가능성도 있다.

원산학사는 무사로서 무예반에 들어와 배우고자 하는 자는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락하였다는 점과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비추어볼 때 무예학교도 비슷한 성격을 지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원산학사의 경우 무예반은 200명 정원으로 출신과 한량을 뽑아 교육, 훈련하여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별군관은 조선 후기 장신(將臣)들의 전령이나 사환을 맡았던 하급 장교다. 이들은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을 얻지 못한 자나 한량(閑良) 가운데 무재(武材)가 있는 자를 임명했다. 궁성 밖을 순찰·감독했으며 지방의 진(鎭)이나 둔(屯)에 교대로 파견되기도 한 군관이다.

아직도 베일에 감추어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동래무예학교. 이는 최초의 근대학교일 수 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개화기 무예교육을 엿 볼 수 있는 소중한 연구대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동래무예학교의 실체가 밝혀지길 기대해 본다.

*허건식의 무예보고서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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