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산의 무예이야기 1998

2010. 1. 20. 16:02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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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의 불운과 함께 살아 온 안자산은 당시 모든 분야에 포괄적인 관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1886년에 태어나 1946년에 타계하기까지 국학의 전반에 걸쳐 국어학, 국문학, 국사학, 국악학에 이르기까지 조명을 받았던 인물이다.
안자산의 본명은 확(廓)이며, 자산(自産)은 그가 즐겨 쓰던 그의 호이다. 그 동안 그의 생애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체육사나 무술사 연구에 있어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인물로 최근 들어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안자산은 1886년 2월 28일, 고종 23년에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분은 중인에 속하였다. 그가 태어난 1886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해로, 우리나라 개화기의 물결과 함게 그의 인생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815 해방의 기쁨을 나누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8일 작고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해 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923년에 저술한 [조선문명사]에는 "19년 전부터 역사 연구에 착미하더니 중도에 정치학을 강구한 후, 다시 정치사를 연구함에 입한 지다"는 말이 있다. 이로 보아 1904년, 그가 18세부터 역사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산'이라는 호는 자유, 자주, 자치의 사상을 표명한 것으로, 1904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지식층으로서 느낀 위기삼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반도가 일제의 손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가 20대 젊은 청년의 시절이었다. 일제의 비극을 경험한 그는 서울을 떠나 마산으로 내려갔고, 그 곳에서 선교사가 세운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그의 제자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이은상(1982년 작고)은 자산이 수업때마다 '대한제국의 국민'임을 강조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고, 1916년 다시 돌아와 마산에서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 후 1917년에 [조선문법]을 저술했고, 1918년 3.1 운동과 더불어 서울로 다시 올라와, 1921년에 [아청]이라는 조선청년연합회의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그 후 7-8년간 만주, 중국, 미국(하와이) 등지를 주유하며 지내다가 방랑의 시간을 정리하고, 1938년 서울로 돌아와 국학 탐구에 전념하였다. 그동안 연구해 놓은 다양한 분야의 글을 발표하면서 [조선무사영웅전]을 발간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정당활동도 계획하였으나, 1946년 갑작스런 병으로 작고하였다.

그가 저술한 [조선무사영웅전]의 전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무사도와 그의 원류 : 서언, 무사도와 그 유래, 무사의 발전, 무사의 단체, 무사의 계명과 실례, 무사도와 종교, 무사의 가악과 문학, 여조 이후의 무사, 무사도와 윤리사
제2장. 무예도 : 총설, 궁술, 격검, 유술, 경마, 축구격구, 석전, 무예와 한교
제3장. 무예와 미담 : 삼국시대, 여조시대, 조선시대

그는 무사 성신이 무사적 덕성이며, 인간 생활은 무사정신으로부터라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사건건에 이 인내, 근면, 용감, 단결, 예의 등의 무사적 덕성이 없이는 반드시 실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니, 오늘날 우리가 어찌 이 무사 정신을 강구하고 상득하여 볼 것이 아니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인간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덕성잊 윤리로까지 무사의 덕성을 확대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무술이나 쳬육의 목적과 비교해 보더라도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조선무사영웅전]은 무사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시대에 무사적 덕성이 요구되는 사회로 이를 적용한 적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자산은 여러 논설에서 무술과 무사도를 논했다. 1930년 4월 4일 동아일보의 <기색장색하던 조선 고대의 체육>, 1939년 11월 [문장] 제1권 10호의 <향가와 무사>, 1942년 1월 [반도사회와 향토 만주] 제 1호의 <반도 무사도의 유래와 발전>, 1942년 1월 18일 조선일보의 <독사여록조선무사소사> 등이 있다.

<기색장색하던 조선 고대의 체육>이라는 글에서 나타난 삽화는 고대 격검, 고대 유술이라는 명칭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옮긴 것으로 보이며, 특히 4대 운동법으로 유술, 격검, 볼운동, 경마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서술한 내용을 보면 "차 외에도 각저니 수희(물놀이, 수영)니, 편쌈이니, 석전이니 하는 것이 있었으나, 학술적으로 제정되어 내려온 것은 우사과의 재(在)하니 차(此)의 유래급기내개를 자체로 설명하려고 한다. (내용에 있어 이것은 원문으로 현대어와 달리 문법의 차이가 있다)" 라고 하여, 이 때 각저와 수영, 석전등을 제시하고 있으나, 자산은 문헌상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무사영웅전]의 제 2장 무예고에서는 '궁술', '석전'을 과감히 다루고 있다.

<반도 무사도의 유래와 발전>에서는 상고 무사, 삼국 무사, 외래 문화, 여조 무사, 무예, 그리고 조선 무사들의 활자를 크게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무사영웅전]의 내용을 간추려 놓은 듯 하다.
<향가와 무사>의 글에서는 "향가의 발생은 곧 고대 무사들이 창작한 바"라고
하여, 향가와 무사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도솔가를 지은 승려 월명이
화라이었으므로 향가만 알고 불가는 모른다는 삼국 유사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당시 신라인들에게 향가는 기본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조선무사영웅전]에서는 유술과 택견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유술은
고려 15대 숙조왕 때 일종의 정재로서 음악과 함께 병진하였으며, 그 후
충혜왕때부터 점차 유행을 보아 수박 혹은 권법이라고 하여 유행하였고,
고려 인종왕때에는 유흥의 1과로 행하여짐과 동시에 군인이 상예로 행하기까지
되었다. 그 후 점차 발전하여 25법이 생겼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한 우리 나라 전통 무술 택견의 시작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고구려 시대 고분 벽화에 택견을 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행해졌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후의 자취에 있어서도 자산은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는 것이
그 종류다" 라고 명기하고 있다.

안자산이 살아온 길이나 그의 글들은 외래 문화의 수용과 토착화 문제에 대해
전통과의 융합을 노력한 흔적들이 있다. 그는 당시 서양 문물을 선호하여
그에 빠져 있던 지식층의 사고와는 달리, 서양 사상에 일방적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전통과의 융합 관계를 모색하여 온 새로운 발전의 논리를 추구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특히 무사의 덕성을 통해 국민의 원기를 찾고 민족 체질을
개조할 수 있으며, 진실한 민성을 함양할 수단으로서 무술을 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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