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의 모든것

2011. 10. 8. 22:31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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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 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했다.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 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에는 3·1 독립시위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교세를 확장했다.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도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전쟁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중국이나 일본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또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20년 이후 상해임정이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현재 교하현)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대황지(현재 남강자)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영안현 신안촌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 나갔다.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해방이 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신흥대학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경영난에 처하게 되었으며,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인수한 뒤,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교명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연혁

 
1907. 4 항일비밀조직 신민회 결성
1910. 3 신민회 긴급회의, 국외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 결의
1910. 12 이회영 6형제 등 국외독립기지 선발대로 망명
1911. 2 이상룡 등 안동의 애국지사들 서간도로 망명
1911. 4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자치기관 경학사 설립
1911. 6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 설립 (1911. 6. 10)
1912. 7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1913. 3 신흥무관학교 교관, 졸업생 등 신흥학우단 조직
1913. 6 신흥학우단의 기관지 ..신흥학우보.. 창간
1915. 1 쏘배차에 군영인 백서농장 경영
1915. 12 이주민 통합자치단체 부민단 설립
1919. 3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독립축하집회 만세시위
1919. 4 서간도에 남만주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와 군정부 수립
1919. 5 유하현 고산자 하동 대두자에 신흥무관학교 본교 개교
1919. 11 서간도의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명칭 변경
1919. 11 김원봉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길림성에서 의열단 결성
1920. 7 일제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 폐교
1920. 7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생도, 군인 조직) 안도현으로 이동
1920. 10 홍범도부대와 함께 청산리전쟁 참전
1920. 11 일본군의 보복 학살로 경신참변 발생
1921. 5 길림성 액목현 대갱자에 검성중학원 설립
1947. 2 이시영,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계승한 신흥전문학원 설립
1947. 7 해방 후 전만주 신흥학우단 신흥전문학원에서 모임 결성
1949. 2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으로 개편
1949. 3 신흥대학 정규대학으로 승격 인가
1949. 7 신흥대학 1회 졸업생 배출
1950. 5 신흥대학 2회 졸업생 배출
1951. 5 조영식, 피난지 부산에서 신흥대학 인수 (1951. 5. 18)
1960. 4 신흥대학에서 경희대학교로 교명 변경
무관학교 주요인물 및 졸업생
구분 성 명 주요사항
신흥무관학교
설립 관련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건영
우당 6형제 중 장남
이석영
우당 6형제 중 차남, 신흥무관학교 설립 위해 전 재산 처분
이철영
우당 6형제 중 3남,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회영
호 우당, 6형제 중 4남, 항일구국연맹의장
이호영
우당 6형제 중 6남, 북경에서 독립운동
김대락
호 백하, 안동 협동학교 설립 후 만주 망명
김형식
김대락의 차남, 조선의용군 북만지부장,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
김동삼
백서농장 장주, 서로군정서 참모장, 정의부 참모장
김창환
대한독립군단 대대장, 한국독립군 부사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상룡
경학사장, 한족회 총재, 정의부 독판, 임시정부 국무령
이시영
우당 6형제 중 5남, 임시정부 법무총장, 초대 부통령
이동녕
초대 소장, 임시정부 국무령, 임시정부 주석
박찬익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
윤기섭
학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이 광
임시정부 외무부 북경주재 외무위원, 해방 후 체신부 장관
이 탁
광복군총영 참모장, 임시정부 동삼성 외교위원부 위원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김원봉
의열단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선의용대대장, 광복군부사령관
청산리 전쟁
참전
신흥무관학교
교관
지청천
청산리전쟁 참전, 대한독립군단 여단장,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청산리전쟁 참전, 광복군총사령부 제2대장, 초대 국무총리
박영희
청산리전쟁 참전, 신민부 성동사관학교 교관
이장녕
청산리전쟁 참전, 대한통의부 참모
오광선
청산리전쟁 참전, 동북항일한중연합군 독립대대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오상세 청산리전쟁 제4중대장, 신민부 성동사관학교 교관
강근호 청산리전쟁 소대장, 고려혁명군사학교 교관
김 훈 청산리전쟁 소대장, 중국명 양림, 홍군 15군단 돌격대 참모장
이운강 청산리전쟁 소대장, 만주 화림학교 교사
백종열 청산리전쟁 종군장교, 신민부 성동사관학교 교관
이붕해 청산리전쟁 종군장교, 재만한족총연합회 군사위원장
이민화 청산리전쟁 종군장교, 고려혁명군 참여
김승빈 청산리전쟁 참전, 고려혁명군, 소련군 국경수비대
김중한 청산리전쟁 참전, 만주 태래현 신흥소학교 설립
장두관 청산리전쟁 참전, 국민당 혁명군 참전
대한통의부,
조선혁명군,
광복군 간부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세영 주만통군부 군사부장,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흥무관학교
교관
신팔균 대한통의부 사령장 겸 총사령관
신흥무관학교
졸업
채 찬 대한통의부 중대장, 강계주재소와 조선총독 사이토 습격
권 준 조선의용대 비서장,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광복군 5지대장
김우근 대한독립단 토벌대장, 조선혁명당 지방책임위원
김학규 조선혁명당 당군사령부 참모, 광복군 제3지대장
문창숙 참의부 중대장, 군자금 모집, 국내 잠입 체포 순국
박태열 광제청년단 조직, 광복군 총영 조직 결사대장
송호성 중국군 대좌, 광복군 총사령부 편련처장, 광복군 제 1지대장
교육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 준
부민단장, 서로군정서 부독판, 검성중학 교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김도태
오산학교 교사
변영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제3대 외무부장관
이규동
신흥중학 교사, 영길현에 신창학교 설립
기타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경천
본명 김광서, 고려혁명군 사령관, 수청고려의병대 사령관
신흥무관학교
졸업
김 산
본명 장지락, 님웨일즈 <아리랑>의 주인공, 중국대혁명 참전
원병상
교관, 신흥무관학교 수기 남김
이규훈
이건영의 차남, 상해에서 독립운동
이규준
이석영의 장남, 다물단 조직, 밀정 김달하 처단
이규룡
이회영의 장남, 신흥무관학교 교사, 군자금 모집
이규학
이회영의 차남, 다물단 조직, 밀정 김달하 처단
이규창
이시영의 장남, 신흥대학 학장
이병화
이상룡의 손자, 통의부 위원, 남만청년동맹 선전부 간부


자료출처 ttp://www.sh100th.org/

사진은 신흥학우단이 발간한 잡지 '신흥교우보'의 표지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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