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패 건달들이 복싱대회에서 사라진 이유

2010. 4. 5. 21:43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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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설립된 최초의 영화관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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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단성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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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단장한 단성사


우리나라에 복싱이 유입된 것은 1912년 10월 7일 단성사 주인이었던 박승필에 의해 <유각권(柔角拳)구락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다. 유술, 씨름, 권투가 모인 이 단체는 최초의 무술단체가 된다.

이 시기는 서양에서도 복싱에 대한 경기규칙이 확정되기 이전이다. 원래 복싱은 1920년 안트워프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종주국인 영국은 1908년 런던올림픽에 밴텀, 페더, 라이트, 헤비급으로 4체급경기를 시범종목으로 채택해 전종목을 우승한바 있다.

4각의 링을 만들고 글러브를 착용한 국내 최초의 복싱은 1925년 1월 30일 YMCA의 실내운동회(일명 서커스대회)에서 첫선을 보인 것이다. 초창기에 이혜택(1906-1965)과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슈버가반하트가 심판을 보며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YMCA는 1927년 30명을 모아 권투부를 조직하고 이듬해부터 전조선권투대회를 주최하여 우리나라 복싱을 본궤도로 오르게 한다. YMCA와 함께 일본에서 복싱을 배워온 성의경은 1929년 안국동 네거리(옛 신민당사뒷편)에 <조선권투구락부>를 만들고 자비로 선수를 육성해 우리나라 복싱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했다.

복싱대회가 열릴때면 당시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에서 주먹으로 먹고살던 건달들도 선수로 출전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건달의 입장에서는 글러브를 끼고 툭탁거리는 애송이 학생들(복싱관원들)이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막상 링에서 경기는 수월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기규칙상 힘으로 건달짓을 해 온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다. 힘으로는 이길법 한데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 나가는 YMCA선수들에게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결국 화가난 건달들은 상대선수를 붙잡아 떠밀고 딴죽을 걸어 넘어뜨리는 복싱아닌 싸움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대회 심판이었던 이혜택, 장권, 김영구 등은 뒤엉켜 있는 선수와 건달들을 떼어놓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도 있다. 시장터의 건달들은 결국 모두가 패해 구경나온 똘만이들에게 망신들 사는 일이 발생했다. 2-3년이 지나자 건달들은 복싱이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복싱대회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 글은 1978년 3월 20일 경향신문에 연재된 <얘기로 풀어 본 한국스포츠80년>을 재구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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