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경호조직에서 청와대로 간 합기도

2010. 5. 18. 09:47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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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합기도원로 지한재사범이 한국을 찾았다. 선문대에서 합기도지도자들과 합동수련을 하고 무카스의 허인욱무술전위원이 지한재사범 삶을 체록했다. 체록내용을 보면 해방이후 합기도사를 말해 주는 대목이 많을뿐만 아니라, 청와대 경호실에서의 합기도인들의 삶도 들어 있다. 210년 5월11일자 <원로이야기 박정희대통령과의 인연-지한재4>를 옮겨보았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정치인들이 무술인들을 경호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특별훈련을 했던 일, 박정희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청와대 근무시절의 직급과 월급, 그리고 대통령아들이었던 박지만을 지도했던 일 들이 있다.

무예사적인 측면에서는 화랑도의 이주방, 국술의 서인혁씨에 대한 당시 활동상을 말해 주고 있으며, 신무합기도의 창설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18기와의 교류등도 있다. 특히 태권도의 초기모습과 태권도시범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어, 해방이후 합기도와 태권도의 관계가 큰 차이가 없었던 대목도 설명하고 있다.

아래의 기사는 지한재사범의 의견을 중심으로 다룬 기사이기때문에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다. 좀 더 많은 당시의 무예인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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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에 있을 때 관상의 대가 백운학(白雲鶴) 씨가 각기병에 걸린 채, 차두만이라는 사람과 같이 찾아 왔다. 백운학 씨가 ‘의사가 6개월 밖에 못 산다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백 선생님은 장래를 내다보시는 분이신데, 6개월 살다 죽으나 더 살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운동이나 하다 죽으십시오”라고 했더니, “우리 선상님 말 참 마음에 드네요”라면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꼭 10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인연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김포공항에 각자 전송하러 갔다가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방송이 나왔다. 기가 막혔다. 당시 백운학 씨가 성무관(聖武館)이라는 관명을 지어주었다. 성인 성(聖)자를 쓰는 것인 만큼 관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게 없다고 했다. 1960년 4․19 혁명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이승만 박사하고 맞대결 하는 대통령 후보로 노동당의 전진한(錢鎭漢, 1901~1972년)씨가 있었다. 백운학 씨를 통해 전진한 씨를 소개받고 그를 경호할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이 한봉수(1933~2007)․김용진․김영환․최세호․조문영 이상 10명을 모아 중부시장에서 6개월 간 특별훈련을 했다. 그런데 전진한 씨가 통일당 김준연(金俊淵, 1895~1971)씨와 통합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동당으로 출마할 수 있어도 통일당으로는 출마할 수 없다는 법적인 해석이 나온 것이다. 이미 노동당은 없어졌으니, 전진한 씨가 출마할 수가 없었다. 출마를 포기한 것이다. 열심히 수련을 한 이들은 다시 합기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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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유희의 지한재(왼쪽)
내부적으로는 마장동 시절부터 일성체육관까지 쭉 수련을 해 온 강정수․이태준․명광식 등의 그룹과 중부시장 옥상에서 경호를 위해 특별 수련을 한 한봉수․김용진․김영환 그룹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앞서 시작한 그룹은 대학생 출신을 중심으로 한 반면, 다른 그룹은 힘좀 쓰던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앞서 시작한 쪽을 우습게 안 것이다. 그래서 한 쪽은 먼저 수련을 시작한 고참이라는 점을, 다른 한 쪽은 나이도 많고 특별반 수련생이라는 점을 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다시 중앙극장 앞으로 도장을 옮겼다. 강정수라는 사람의 부모 도움으로 차렸는데, 그 때 김무홍 씨가 찾아왔다. 김무홍 씨는 1961년 5․16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레슬링 배워서 올림픽 나가겠다고 라고 하면서 내게 “형님 서울로 불러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중앙극장 앞에 있는 내 도장으로 오게 했다. 6개월 간 도장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먹고 자고 했다. 그 당시 김우탁(金佑鐸) 씨와 허일웅(許一雄) 씨는 자띠를 메고 있었는데, 김무홍 씨가 종로 4가 종묘 입구 3층에 신무관(新武館)을 차릴 때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안타깝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서인혁 씨는 내가 서울 올라온 이후 대구에서 야와라를 배웠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내가 서울 마포 형무소 자리에서 도장을 하고 있을 때, 군대 모자를 쓰고 와서 ‘나도 최용술 선생에게 합기도 배웠다’고 말을 했다. 동문이니까 친절하게 맞이했다. 서인혁 씨가 자기 특기는 투석술이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몸에 힘주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그 기술을 배워 가지고 김무홍 씨 도장으로 갔다. 그 때 김무홍 씨가 군에 가서 없었고 원광화(元光和) 씨가 그곳에 총무로 있을 때였다. 서인혁 씨는 그 후 만리동에 도장을 냈다가 부산으로 내려가 ‘합기도 국술원’이라는 명칭으로 도장을 냈다. 서인혁 씨의 제자 중에 화랑도로 활약을 하고 있는 이주방(李柱邦) 씨가 있는데, 화랑도라는 이름을 먼저 붙인 것은 내 제자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화랑도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고 있다.

중앙극장 앞에 있을 때 5․16이 일어났고 이후에 화신 앞 동일빌딩으로 도장을 옮겼다. 화신 앞에 있을 때 ‘기도회’를 창설하였다. 이 도장이 원래 무도장 자리여서 장소가 넓었다. 방이 많이 있었는데, 내가 어릴 때 중국에 살아서 중국말을 할 줄 알아서 대사관을 찾아가 임품장․여품삼 선생을 만나 한국 사람도 가르쳐야 된다고 설득을 했다. 여품삼 씨는 큰 중국집인 송도 태화관 주인 아들이었으며, 임품장 선생은 중국 대사관 안에 도장을 가지고 있었다. 임대료 안 받고 무료로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중국 18기 사범들과 교류가 시작된 계기를 처음 마련한 것이다. 이때 딱 두 가지 기법을 배웠다. 주먹이나 발이 들어오는 것을 양손으로 올려 막거나 내려 막으면서 발을 차는 기법과 앉으면서 앞으로 긁으면서 걸어 차는 소당퇴(掃襠腿)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은 중국 국술에서 배웠다는 말을 분명히 하고 가르친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에 있으니 도장 운영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운영이 어려워져서 세기극장 앞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는 미국에 나가려던 최세호 씨가 기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불손하게 나와서 손을 봐줬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서대문 전매청 앞으로 도장을 옮겼다가, 서대문 중소기업은행 창고로 옮긴 것이 국내에서 마지막이었다. 중소기업은행 뒤의 창고는 박종규 씨가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마련해 주었다. 한 번은 가라테 극진회관 최영의 씨가 서대문 도장에 왔다가 병목 격파 이야기를 하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우리는 병 3개씩 날리던 때였는데, 최영의 씨가 병을 깨는데, 안 깨지는 것이었다. 명광식․강정수 씨는 그냥 병을 팡팡 그냥 날리던 때였다. 최영의 씨가 설명을 얼마 하지도 못하고 그냥 간 기억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 합기도 교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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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재 선생
서울에 올라와서 5․16이 일어난 전전 해부터 육군사관학교의 합기도 사범으로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지지행진을 했는데, 교관의 일원이던 나도 지지대열에 참여했다. 이 당시가 화신 앞 동일빌딩에 있던 때였다. 지지대열에 참여한 인연으로 박종규 씨를 알아서 국가재건최고위원 경호 조직으로 들어가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의장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정리자 주 :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과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경호대’가 창설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청와대로 편입될 때 자연스럽게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1979년 12월 25일 이전에 나올 때까지 18년 동안 재직을 했다. 처음에는 3급 을이었다가 3급 갑으로, 다시 차지철(車智澈1934~1979)씨가 2급 을로 올려줬다. 부이사관급으로 당시 치안국장이 2급 을이었다. 박종규(朴宗奎 1930~1985) 씨가 주어서 관차도 타고 다녔는데, 박종규 씨는 국가재건최고위원 경호조직일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월급은 보통 공무원의 4~5배를 받았다.

경비원 안에 도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경호원들을 가르쳤다. 박종규 씨나 국가재건최고의회 신동관 씨는 민정이양 된 후에도 삼청동 본관에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차지철 씨도 내 개인지도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차지철 씨는 효자였으며 충신이었다고 본다. 차지철 씨 어머니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는데, 추운 겨울 날씨에도 차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차 밖에서 추위를 이기느라 뛰면서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모습이 기억난다.

박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씨도 초등학교 가기 전에 합기도를 가르쳤다. 한번은 박지만 씨가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친구와 싸움을 하다가 팔을 꺾어 부러뜨린 일이 있었다. 친구 부모가 청와대에 전화를 해서 ‘대통령 아들이면 팔 부러뜨려도 되냐’면서 항의를 했다. 문제가 되자, 박종규 씨가 한 두 달 청와대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그 때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심사도 하고, 세미나도 한 기억이 있다. 그 후 잠잠해지자 다시 들어갔다.

청와대 경호실에 태권도 사범으로 박해만 씨가 있었는데, 후에 내가 청와대에서 시범한 동작들을 가지고서, 그 분이 태권도 국기원 시범 부장 할 때 많이 사용한 것으로 안다. 한 번은 ‘박사범 왜 내 기술 다 가져가느냐’고 물었더니, ‘먼저 쓰는 것이 임자’라고 대답했던 일이 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원문보기 http://www.mookas.com/media_view.asp?news_no=1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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