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刀法) 최고의 명인, 비천 이영식 사범

2012. 2. 24. 21:20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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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도법의 1인자로 불리던 이영식사범. 그는 인생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많은 검도인들이 그를 흠모(?)했고, 그의 도법시범 자세에 매료된 적이 있다. 대한검도회에서는 아까운 사범 한명을 잃었고, 그 역시 인생에서 수많은 갈등속에 도법인생을 버리려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몇 안되는 제자들에게 도법을 전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배운 많은 제자들이 나가 개인단체를 만들어 00도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홍보할때는 그는 묵묵히 그의 철학이 담긴 도법을 얼마 안남은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무술사 연구에서 이영식사범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죽도검도만을 고집하던 한국의 검도계에 진검이라는, 그리고 일본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강남 신사동에 검도장을 개관해 검도와 도법을 알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삶과 도법인생은 앞으로 연구자들이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80년대 무술을 흥미로 여기던 시대에 독학한 도법의 진수를 알렸고, 90년대 검도바람이 불때 그는 검의 본질을 전수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무술계에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고, 유명가수였던 유연실의 남편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다행스러운것은 그가 갈등을 맞이할때 한겨레신문 1997년06월05일자  '명인을 찾아서'라는 시리즈물에 "베는 남자, 이영식"이라는 제목으로 이영식사범의 모든것을 소개했다. 
그 내용을 올려 본다.  

칼은 날카로운 물건이다.
그러나 칼을 쥔 사람이 모두 다 그 칼처럼 날카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칼이 날카로워질수록,
사람은 더욱 부드러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다고
거듭 토로하는 검객 이영식에게서,
손에 쥔 칼로 짚단을 베어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칼로 번민을 베어버리는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 시대 또 한 사람 명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영식은 1949년 3월 19일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했다.
중학 시절 공수도를 익혔고, 고등학교 때 당수를 배웠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박도 초단을 땄다. 중앙대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67년 해병대를 지원하여 69년 1월 월남전에 청룡부대로 파병되기도 했다.

75년 경 당수를 익히던 동기생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태권도로 옮겨가던 때에, 그는 합기도를 시작했다. 노량진의 무무관에서 합기도를 시작했던 그는 합기도 협회의 사무총장이었던 김영진씨와, 명재욱씨를 사사하여 집중 지도를 받았다.

합기도 5단에 이른 이영식이 칼을 잡기 시작한 것은 80년부터다. 그 무렵 이민을 계획 중이었던 그는 무술전문인으로서 이민을 가려면 병기술을 하나 익혀야만 했기 때문에 칼을 택해 수련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스승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그는 대한검도회 5단인 송병관씨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1년 간 받았다. 처음에는 묘기 위주로 수련을 했다. 65cm 정도의 중도로 허공에 던져진 명함을 반으로 자르는 기술을 위주로 배웠으며, 대도로는 베기와 형을 익혔다.

베기 기술을 국내에서 배우기는 힘들었다. 좌우 내려베기를 하는 사람이 김영달씨, 서정학씨 등 국내에서는 손으로 셀 정도였다.

칼의 제작 기술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만들어진 칼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방법 자체도 전승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송병관씨가 건네준 일본 책 하나가 이영식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일본의 실전 베기 일인자인 나카무라 다이사부로의 책이었는데, 다다미 베기, 대나무 자르기 사진 등등이 실려 있었다. 이영식은 그 책을 보고 사진을 통해 베기 기술을 연구했다.

80년부터 칼을 잡은 그는 87년부터 TV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는 거의 95퍼센트의 성공률을 얻을 수 있었다.

주로 명함 자르기 시범을 보이던 중, PD가 콩 같은 것을 자르는 것이 좀 더 멋지겠다고 제안을 해서 일주일간 연습하여 다섯 개의 콩을 던져 3개를 잘랐다. 콩을 자른다고 하면 엄청난 것처럼 들리지만, 명함이든 콩이든 큰 차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칼로 자르려면 그 중심을 베어야 하고, 큰 물건이나 작은 물건이나 중심선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TV에 출연해 베기 묘기로 이름을 얻기는 했으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단지 묘기일 뿐이며, 진짜 칼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들은 명함을 베고 콩을 자르는 것을 보고 ‘이영식이 칼의 달인이다’라고 추켜세웠지만, 정작 본인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비로소 칼을 잡은 사람의 원초적인 질문 - 진짜 무사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 하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대구의 윤병일 검도 8단에게 본격적으로 검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윤병일씨에게 그는 대도 쓰는 법과 거합을 배웠으며, 또한 대단히 중요한 만남의 계기를 얻었다.

이영식이 나까무라 다이사부로의 책을 집중 연구하고 혼자 공부해온 것을 안 윤병일씨가 일본에 직접 편지를 써주어서, 그 인연으로 나까무라 다이사부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책을 보고 혼자 칼을 연구했다는 한국의 청년을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온 나까무라 다이사부로는 이영식이 칼 쓰는 것을 보고 혼자 정말 열심히 연습했구나라고 말하며, 일본에 이영식 같은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좀 더 일본의 검법이 발전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영식에게 거합 7단을 제수했다.

나까무라 다이사부로는 이영식씨에게 일본 발도도의 한국 지부를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으나, 이영식은 거절했다. 무술은 문화와 같은 것이라 교류는 할 수 있어도, 한 나라의 무술 전통 밑으로 들어가서는 제대로 된 우리 식의 칼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일본을 오가며 나까무라 다이사부로, 그리고 그 제자인 베기의 달인 사루다 씨등과 교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각종 큰 검도대회 식전 행사 등에서 베기 시범을 보인 이영식은 대한검도회에서 명예 4단을 받고 영무관이라는 검도장을 차려 본격적으로 칼 연구에 들어갔다.

한국의 전통적인 검법을 익히고는 싶었지만 선생을 만나지 못해 홀로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전통적 검법도 그냥 재현해서 될 일이 아니고 검리에 맞게 재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 하기는 힘들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는 쉽지만 나쁜 습관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 시행착오를 거치며 10년을 연구한 결과를 제자한테 가르치면 제자가 익히는 시간은 고작 1년 밖에 걸리지 않는 식이었다.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베기 대회 등에 참가하여 사루다의 연속 베기를 보고 나름대로 연구도 해보았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베기만 하는 것은 실전적인 칼쓰기와는 다르다는 것이 이영식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포로나 죄수를 참할 때나 쓰는 것이지, 움직이는 상대를 베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영식은 설령 물체가 고정일지라도 움직이는 상대라고 가정하고 걸음을 써서 움직이며 칼을 쓰는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94년 그의 베기 시범을 담은 비디오 테잎을 제작하며 지금껏 그가 막연하게 생각해온 실전적인 칼쓰기를 ‘도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게 나온 것이 <도법 (베기 교본)>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잎이었다.

대한검도회를 떠나 대한도법협회를 만들고 그곳에서 도법을 연구하던 이영식은 97년 노대래, 김은정씨와 함께 해동도법 검도회를 설립하고 싸우라비도법 연구소등에서 계속 도법을 연구해왔다. 현재는 김영섭씨의 마상무예 단체인 충혼당에서 칼을 전담하는 도부 위원장을 맡기도 했었다.

이영식은 국내 검도계에서는 참으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어떤 유파 속에서 검을 익혀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아내고 부딪혀가며 자신의 칼을 만들어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국내의 무술계에 범람하는 각종 단체와, 다른 유파에 대한 비난과 경계 풍조에 대해 이영식은 ‘검객’이라면 흔히 연상하기 쉬운 고집을 내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기본 자세를 잃으면 무도인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그는 말한다. 세상이 변한 만큼 무술계에도 필요한 사람이 많이 생겼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것보다는 다 함께 무술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소망한다.

모두 용서하고, 모두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이, 국내 실전 베기의 일인자라는 이영식의 생각이었다. 그는 한 자루 칼로 눈앞의 그 무엇을 베는 것이 너무나 좋아, 다음날 아침 일어날 때 손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수백 장의 명함을 베어낼 정도로 ‘베기’에 열중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은 그렇게 베어대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무사가 마음 속에 가져야할 곧은 칼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영식의 ‘도법’ 연구가 완성되는 날, 우리는 또 다른 칼이 검객 이영식의 손에서 빛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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