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무예, 연개소문을 통해 알 수 있다 2002

2010. 1. 20. 16:06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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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중국 경극에서도 강인한 고구려무사로 등장


원안이 연개소문
우리 무예계에서는 고구려의 무예에 대해 막연한 추측만 나돌뿐 그 사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패전이 없었다는 연개소문의 기록을 보면, 당시 고구려무예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0일 보도된 <국정브리핑>의 동아시아 전쟁사 유일한 중심인물이라는 주제로 과학저술가 이종호씨에 의하면, 고구려가 20여년간 당나라와 전쟁서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연개소문이 죽을 때까지 당과의 전쟁에서 줄곧 승리한 데 있다고 보는 경향이 크다고 밝혔다. 이러한 영향으로 결국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의 연합에 나ㆍ당 연합하게 되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반당 연합세력을 형성했다.

결론적이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 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중국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푸른빛의 얼굴 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경극에서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던 중국인들의 바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강화도 일대에도 연개소문과 관한 전설이 남아 있다.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북쪽 시루미산에서 태어나 치마대(馳馬臺)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다는 것인데, 이곳에는 현재 연개소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 있는 ‘고인돌 공원’ 에 있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그를 극찬했다.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 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

사진은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이다. 칼 한 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 탄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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