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벨트와 농구

2017. 5. 18. 18:15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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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1품은 품띠, 2품은 검은 띠를 매는 거야. 아빠! 태권도 몇 단이에요?” 
“아빠! 공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려면 연습이 필요해. 아빠! 농구할 줄 알아요?”

아들이 태권도장을 다닐 때 거울 앞에서 도복 매무새를 하며 띠를 만지던 것이 기억난다. 도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아들은 3품 심사를 앞두고 태권도를 중단했다. 이후 농구클럽에 들어가 농구공을 돌리며 우쭐댔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한마디 던졌다. 

“아빠! 태권도는 띠가 있어 색깔별로 다르게 배우는데, 왜 농구는 그런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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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에서 블랙벨트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미지중앙무예 속의 띠


교육과정별, 숙련별 외형적 표시는 무예 이외에는 보기 드물다. 무예에서는 마치 군대의 계급장처럼 띠를 통해 그 사람의 숙련도를 표시한다. 태권도의 띠는 원래 흰색부터 노랑, 파랑, 빨강, 검정만이 있었다. 이 색깔은 음양오행의 오방색에 기인한다. 하지만 지금은 중간중간에 초록색, 연두색, 밤색 등을 포함해 급별로 9개의 색을 적용하기도 한다.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는 무예수련은 바로 띠의 색상 차이로 인해 권위와 상하 관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태권도원로들은 이 색에 대해 음양오행과 같은 철학적 고민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정착됐다고 말한다. 수련생들에게 성취감을 심어주고, 수련에 대한 동기를 유발하는 등 체육관 운영의 묘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러던 것이 요즘에는 하얀 띠는 처음 배우겠다는 깨끗한 마음을 상징하고, 그 다음은 씨 뿌리는 흙을 상징하는 노랑 띠, 새싹과 같은 초록 띠와 파랑 띠, 단풍처럼 기술이 무르익는 다는 빨간 띠, 완성되기 전의 품 띠, 완성의 의미 검은 띠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각기 다른 해석일 뿐이다. 또, 일부 학계에서는 단순히 계급을 정하거나 승급심사 합격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 띠 속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유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철학적 접근을 내놓기도 한다. 이쯤이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다. 

검은 띠(Black Belt)는 유단자를 의미한다. 서구사회에서는 4단이 아니더라도 검은 띠를 차면 숙련된 무예인으로서 존경받는다. 검은 띠는 종목마다 수련의 깊이가 다르다. 태권도는 1년이면 유단자가 될 수 있고, 가라테의 경우에는 3년 정도, 주짓수의 경우에는 10년 정도 수련을 해야 가능하다. 이러다 보니 검은 띠 중에서도 주짓수의 검은 띠는 다른 무예의 검은 띠에 비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띠를 통헤 수련체계를 구분 짓지 않는 무예 종목도 많다. 검도, 삼보, 우슈 등은 수련에 따른 띠가 없다. 

검은 띠의 유래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검은 띠가 무예의 상징이 되게 된 유래는 어디에 있을까? 현대 유도의 창시자로 불리는 일본의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에 정답이 있다. 18세기말 가노는 일본 유술들을 정립해 고토칸[講道館] 유도를 창시했고,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위원이 됐다. 가노는 자신이 설립한 고토칸 도장에서 초보 수련생들은 흰 띠를, 사범급들에게는 검은 띠를 매게 했다. 이것이 시초인 것이다. 흰 띠가 오래 수련하다보면 갈색이되고, 그 이후에는 검은 빛을 띠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또, 검은 띠를 오래도록 수련하다 보면 다시 흰 띠가 된다는 말도 있다. 검은 띠를 오래도록 사용하면서 세탁하고 띠의 섬유가 탈색이 돼 다시 흰색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 오래도록 수련한 무예인들의 띠를 보면 은은하게 검은 색이 빠진 띠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도의 띠 체계를 모방해 가라테, 태권도, 주짓수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초단(1단)이나 9단이나 같은 검은 띠를 매는 까닭에 일단 검은 띠면 숙련도에 있어 차이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현지인들이 검은 띠를 딴 후 자신의 사범옆에 도장을 차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같은 검은 띠라도 숙련도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띠에 표시를 하거나, 주짓수처럼 수련기간을 10년 정도로 확대한 경우도 있다. 

또 유도의 경우에는 용띠나 범띠라고 불리는 홍백 띠를 적용하고 있다. 6단에서 8단의 고단자들이 착용하는 띠로 붉은색과 흰색을 번갈아가며 만든 띠다. 하지만 홍백 띠는 고단자라고 무작정 매는 것은 아니다. 스승이 있으면 제자는 홍백 띠를 맬 수 없다는 규율이 있다. 홍백 띠는 스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유도 9단은 붉은 색인 홍띠를 맨다. 무예에서 9단이면 입신의 경지로 불린다. 홍띠의 의미는 관용, 사랑, 순교, 신의, 용기를 의미한다.

클라이만 교수의 '동서체육사상의 만남'.


블랙벨트와 농구의 만남?

무예와 달리 농구는 어떻게 지도하고 있을까? 아들 녀석이 궁금해하는 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녀석이 배우고 있는 농구수업을 참관했다. 기본적인 스텝과 패스, 드리블, 그리고 자유투와 간단한 경기를 하고 마쳤다. 무예도장에서처럼 하나의 기술이 숙련될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초보자든 경험자든 똑같은 방식으로 그룹수업이 진행됐다. 단련과 숙련이라는 개념보다는, 빠르게 적응하고 수업 이외에 개인운동이 많은 아이일수록 실력이 돋보일 수 있는 구조였다. 유니폼은 있지만, 대부분 편한 복장으로 수업에 임했다. 

한때 레슬링도 단증을 발급하기도 하였고, 씨름과 복싱은 현재 단증을 발급한다. 그들도 고민해 단증제도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축구나 농구는 단증이 없다. 스포츠와 단증. 복잡해진다. 

23년 전 지금처럼 따뜻한 봄날 대학원에 갓 입학해 첫 수업인 체육철학을 듣는데 지도교수로부터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클라이만 교수의 <동서체육사상의 만남(원저 Mind and Body: East Meets West)>을 건네 받았다. 이 책은 저자의 표현처럼 ‘체육의 철학적 산책서’로 서양의 관점에 대한 질문과 해답, 이어 동양의 관점과 도전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신체의 역할, 운동기술과 습득과 수행에 대한 동양적 접근을 충실히 설명했다. 제법 인상적인 책이었다. 

아들이 태권도수련과 농구수업을 받으며 던진 질문에 무예든 서양의 스포츠든 그 교육방식의 장단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스포츠에서도 블랙벨트를 만들 수 있을까? 딱딱한 분위기에 절도 있고 질서가 있는 무예와는 달리, 농구(혹은 서양의 구기종목)는 시끄럽고 어수선하면서도 자연스런 규칙에 의해 움직이며 수업에 임한다. 무예와 농구 둘은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방식을 접목하면 어떨까? 초보단계에서는 농구처럼 즐거움을 부여하며 동기유발을, 숙련된 단계에서는 무예처럼 수련 성격을 강조해 보다 질서있는 방식으로 하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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